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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뉴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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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1-11-08 22:50 조회6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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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7월말이였다. 나는 감기에 걸려 현 병원에 갔었다. 의사선생님께서는 청진기를 앞가슴, 뒤 가슴에 이리저리 대 보더니 엑스레이를 한번 찍자는 것이였다.

 

그런데 검사결과가 심상치 않았다. 폐에 종양이 있다며 큰 병원에 가 보라는 것이였다. 아무런 증상도 없고 딱히 아는 사람도 없고 하여 한 달이 지났다.

 

마침 우리 큰 시누이가 남편의 이모님이 할빈의 큰 병원에 근무하고 있으니 찾아가 보라는 것이였다.

 

나는 남편과 7개월 되는 아기와 같이 할빈에 계시는 사돈 이모네 집으로 왔다. 거기 주숙 하면서 큰 병원에서 검사 받았다.

 

그런데 청천병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폐암말기라는 사형 선고를 내릴 줄이야. 의사선생님께서는 폐암말기여서 수술도 할 수 없으니 항암치료만 가능하다는 것이였다. 결국 죽기를 기다려야 된다는 뜻과 같았다.

 

항암치료를 받으면 아기에게 모유를 먹일 수 없으니 남편은 아이를 집에 데려다 놓고 오겠다는 것이였다.

 

하여 나는 할빈에 남아서 항암치료를 받기로 하고 남편은 7개월 되는 아기를 업고 집으로 향했다.

 

40년 전에는 할빈에서 목단강까지 가는 열차가 밤에만 있었다.

 

젖 먹던 애가 갑자기 엄마 곁을 떠나자 차에서 밤새도록 울기만 했다. 지치면 좀 그쳤다가 또 울곤 하였단다.

 

그래도 누군가 열차 방송실을 찾았다.

 

지금 7개월 되는 아기를 아빠가 데리고 집으로 가는데 아이가 배가 고파서 그냥 운다고 방송하였다. 모유를 먹이는 애기엄마들이 4명이나 왔었단다. 그런데 아기는 내 것이 아니라고 젖꼭지를 물었다가는 쑥 내 뱉으면서 계속 울었단다.

 

아빠가 울고 아기가 울고 하니 열차 안의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단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세상에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기가 너무 걱정 되여 도저히 항암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이튿날 사돈이모님 보고 집에 가서 아이를 안정시킨 다음 다시 오겠다고 했더니 그러라고 하셨다.

 

내가 집으로 오니 남편이 이미 친정 오빠한테 나의 병명을 얘기한터라 오빠는 마침 잘 왔다 하면서 북경으로 가자고 하였다.

 

오빠는 나를 데리고 북경으로 떠났다. 그런데 나는 운이 참 좋았다. 오빠 처제가 북경에서 살아 먹고 자는데 불편이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1979년 5월부터 개혁개방정책을 실행한터라 북경 어느 병원이든 마음대로 검사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고급간부들만 병 볼 수 있다는 북경 수도병원에서도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모두 종양병원에 소개해 주었다.

 

종양병원에 가면 무조건 수술을 받아야 했다. 수술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두고 한참 고민하던 오빠는 입을 열었다.

 

야! 정옥아 수술하자. 만약 수술해 보면 암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니?

 

오빠의 얘기를 듣고 생각하니 1퍼센트 밖에 안 되는 한 가닥 희망이지만 그래도 나는 오빠의 말에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오빠는 나를 종양병원에 입원시키고 우리 남편을 오라고 해서 간호하게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때 스물일곱 살 밖에 안 되는 나이지만 죽음을 앞두고 나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 뿐이였다.

 

7개월밖에 안 되는 우리 아기가 어떤 새 엄마를 만날까, 착한 엄마를 만날까 아님 사나운 엄마를 만날까... 착한 엄마를 만나야 되는데 어쩌지?! 내가 하늘나라에 가면 착한 엄마 만나라고. 많이 기도하겠다는 생각 뿐이였다.

 

나는 내일이면 수술 한다. 그런데 또 운이 좋았다. 원래 정했던 수술 담당의사가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 병원에서 수술기술이 제일 손꼽히는 의사가 내 수술 담당의사로 교체 되였다.

 

이튿날 나는 기술 높은 의사가 내 수술을 맡았다는 말을 듣고 기분 좋은 심정으로 수술실에 들어갔다. 수술은 대략 4시간 30분정도 걸렸는데 정말 큰 수술이였다.

 

남편은 수술실 앞에서 앉지도 못하고 서서 갔다 왔다 하면서 마음을 조이며 안절부절 했다.

 

혹시 내가 잘못되지 않는지 하는 여러 가지 착잡한 생각을 하면서 기다리는데 4시간이 마치 4년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마침내 수술을 마치고 의사선생님이 나왔다. 남편에게 암이 아니고 크고 작은 고름주머니를 6개 떼어냈고 수술이 잘 됐다고 했다.

 

의사선생님의 말을 들은 남편은 너무나도 생각 밖이라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이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우리 부모님께 알리고 싶었지만 그때는 전화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서신으로 밖에 전할 수 없었다.

 

수술 후 나는 하루가 다르게 완쾌되였다.

그런데 나와 같은 병에 걸렸던 스물아홉 살인 한 여성이 병을 지체하여 고름주머니가 터지는 바람에 저 세상으로 가기도 했다. 나의 눈에서도 눈물이 절로 흘러 나왔다.

 

그때 만약 내가 할빈에서 항암치료를 받았다면 지금 나는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또 북경에서 수술 받지 않았더라면 오늘같이 이렇게 좋은 세상에도 없었을 것이였다.

 

정말 중국의 개혁 개방 덕분에 좋은 병원과 좋은 의사를 만났고 또한 존경하는 우리 오빠 덕분에 제2의 생명을 얻었다.

 

스물일곱 살 나이에 폐암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았던 내가 지금 칠십까지 아주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나는 나의 소중한 삶을 아끼고 사랑하련다.

/박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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