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흐르나 물속의 달은 흐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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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4-02-19 11:01 조회606회 댓글0건본문
얼마전 나는 한국 작가 리문구 선생의 장편소설 "관촌수필"을 읽었다.
이 작품은 "일락서산", "행운류수", "공산토월" 등 8편을 단편소설로 묶었는데 순 우리말과 토속적인 어휘구사로 작자가 나서 자란 충청남도 대천관촌의 아름다운 풍경과 풋풋한 인정을 일인칭 수법으로 서술했으며 한국 근대화, 도시화가 몰고 온 부정적 양상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안겼다.
나와 작자 리문구는 보이는 건 첩첩산이요, 들리는 건 새소리뿐인 시골에서 태여났고 고향의 물로 피를 만든 공통분모가 있어서인지 읽을수록 감회가 깊어졌고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리문구 선생이 나서 자란 고향이 어떤 마을인가를 단편소설 "일락서산"에서 찾아보자.
"400여년 그 허구한 풍상을 다 부대껴 내고도 어느 솔보다 푸르던 그 나무는 으뜸가는 풍모로 마을을 지켜온 왕소나무였다."
"마을 동구밖 대낮 해볓이 슬쩍 지나간 골목집은 장충철이 차린 주막이였는데 하루 일 끝마치고 농군들이 이 주막을 지날때면 서로 서로 동전 몇잎을 꺼내들고 소주를 들이키다가도 바깥에서 음~메하고 암소가 소리 지르면 모두들 툭툭 먼지를 주막에 털어버리고 일어났다."
"이쪽 저쪽에서 하늘자락을 치켜들며 함석지붕 날려와 남창을 뒤덮었던 담쟁이 덩굴, 사철 푸르게 밭마당의 방풍림으로 늘어섰던 들충나무"...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 자장가로 들려주며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밤하늘의 별을 보고 집을 찾아오던 그리운 고향과 국어사전에도 없는 낯설고 상스러운 지방사투리... 이 풍경들은 20년전 작자 리문구가 "내 살과 뼈가 여문 마을"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썼다. 소설의 흐름 따라 많은 감동적인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노라니 지금까지 너무도 고향에 린색한 죄책감에 나의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지난 세기 1951년 여름, 내가 여섯 살 때였다. 나무 그늘 밑에서 누룽지를 먹고 있는데 곁에서 나의 누룽지를 노리고 있던 강아지가 덥석 누룽지를 빼앗아 물고 달아났다. 강아지를 쫓아 낡은 3층집 아래에 자리 잡은 허보토리 집 앞을 지나다가 나는 그만 집을 지키던 송아지만한 황둥개에게 물려 피못에 쓰러졌다.
나의 비명소리를 듣고 부근 에서 방아를 찧던 동네아줌마들이 급기야 달려와서 나를 병원으로 안아갔다. 응급 치료할 때 내가 피를 많이 흘려 아줌마들이 서로 팔을 내밀며 나한테 수혈해 주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강씨, 김씨, 류씨등 아줌마들이 인젠 나이가 많아 언녕 저 세상으로 갔지만 그 사람들의 피가 지금도 나의 혈관에 남아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더없는 슬픔에 잠긴다.
작가 리문구는 소설에서 마을이 황페되고 인심이 갈수록 각박해진 현실을 목격하고 슬픔과 안타까움에 그친 것이 아니라 단편소설 "공산토월"에서 자신이 희생되더라도 이웃과 남을 돕고 구해주는 석공의 비참한 운명을 통하여 글로벌시대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이고 잃는것은 무엇인가를 신랄하게 폭로하였다. 소설에서 작자는 석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석공네 마당의 앙상한 오동나무 가지에 달이 열리고 그 아래에 모닥불이 짙은 연기를 올리며 지펴지자 우리는 마른 참깨 대를 한 아름씩 안아다가 불에 얹었다. 불이 세차게 타오르자 온 동네 아이들은 모닥불 재더미속에서 굴러 나오는 콩알을 주어먹느라고 온 얼굴이 검댕이 칠을 했다. "하지만 이처럼 성실하고 마음이 무던한 석공은 "6. 25"전쟁 때 아버지가 지하활동에 참가하고 석공이 아버지를 도와주었다는 죄명으로 5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44세 새파란 나이에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 아내를 밤낮으로 그리다가 그만 백혈병에 걸려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안되여. 나는 살아야 되어. 나는 살구 싶어. 내가 죽으면 안되여..." 마지막 숨을 토하면서 내뱉는 석공의 말이다. 석공의 죽음은 1990년대 사회경제는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지만 옆집 사람이 죽건 말건, 길가에서 행인이 강도를 당하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는 한국 사회병패를 준랄하게 꼬집는 한 가닥의 직사광이라 할 수 있다.
단편소설 "장곡리 고욤나무"는 리문구의 장편소설 "관촌수필"의 "산마루"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91년 기출씨가 장곡리 집의 고욤나무에서 목매달아 자살한다. 사연인즉 장곡리 마을 주변에서 살던 기출네 집이 도시 확장으로 200평 농가집과 1500평 채마밭이 팔려 이주하면서 나라에서 주는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는데 고향의 집을 팽개치고 도시에 들어가 돈지갑이 불룩해진 두 아들과 딸 사이에 밤낮 돈 다툼하는 꼴을 보다 못해 기출씨가 어느날 밤 자기집 뒤울안에 있는 고욤나무에 목매달아 자살했던 것이다.
소설의 이 대목을 읽노라니 밀물처럼 안겨오는 착잡한 마음 달랠 길 없다. 우리 조선족들 보더라도 더 잘 살아보려고 외국으로, 남방으로 대거 이동하여 많은 것을 얻었다. 아파트가 생기고 자가용을 몰고 다니고 카드 한 장으로 세계여행을 다닌다. 하지만 가슴 아픈 사연은 우리가 조상의 뼈가 묻힌 정든 고향을 떠날 때 자기 손으로 땔 나무를 하고 콩 한쪽도 서로 나누어 먹고 누가 물에 빠지면 선뜻이 강에 뛰여 들어 사람을 구하는 풋풋한 인정은 잃어버렸다.
마을이 텅 비여도 선산은 고향을 지키고 집주인은 떠나갔어도 봄이 오면 제비들이 어김없이 자기 둥지를 찾아오듯이 세월이 아무리 빠르게 변하더라도 사람간의 정리나 초심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
몇 년전 대련으로 갓 이주했던 어느 날이였다. 한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심양아줌마가 "리선생, 한국에서 어제 온 리선생 친구들이 오늘 공원저수지로 유람을 가던데 같이 안 가나요?"라고 묻기에 나는 고향친구 김모에게 전화했더니 친구들이 "마시라, 부어라" 하는 소리가 똑똑히 들리는데도 김모가 하는 대답이 "나 지금 한족들과 마작을 치고 있소."라고 대답하는 것이였다.
내 마음이 무거웠다. 저 친구들 가운데는 총각 때 이쁜 처녀 골랐으나 연애편지 쓸 줄 몰라 나의 도움을 받은 사람도 있고 깊은 밤중에 단박 해산할 아내를 두고 산파를 찾지 해 나를 찾은 친구도 있지 는가? 도시진출은 고향으로 가는 길을 막아버렸고 돈은 친구들 사이에 무형의 "담"을 쌓아놓았다.
철학가 퇴계는 일찍 "부귀는 뜬 구름과 같고 명예는 날아다니는 파리와 같다."고 말했다. 오늘 글줄마다에 흙냄새 물씬 풍기는 리문구의 장편소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나는 설한풍 몰아쳐도 곁눈을 팔지 않는 저 오동나무처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살리라 옷 단추를 바로 잡는다.
세상이 아무리 빨리 바뀌어도 물은 흐르나 물속의 달은 흐르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리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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