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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뉴스

동만지구의 저명한 조선족항일전사 김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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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1-09-24 22:42 조회6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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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화렬사의 조각상
 1931년 2월 5일, 연변주 왕청현 북하마탕 대방자촌(지금의 대흥구진 후하촌)중심의 느릅나무에는 피투성이 된 두 사람의 머리가 걸려있었다.

 

이는 중공 왕청현위 제2임 서기 김상화와 북하마탕촌 당지부서기 한영호의 머리였다. 조선족인 김상화는 김재봉이라고도 불렀다. 1900년 2월, 연길현(지금의 룡정시)의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나 열 살 나던 해에 소학교에 입학했지만 학비를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쫒겨났다.

 

김씨가문의 큰아들로 태여난 김상화는 부모들을 도와 농사일을 하는 외 경상적으로 어머니를 도와 동생들의 옷을 깨끗이 빨고 기웠다. 김상화는 언제나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열성껏 도와주었다. 그의 집이 삼호동(지금의 룡정시 백금향 금호촌)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하루 짐을 나르는 5명의 짐군들이 초기가 들어 강변 풀밭에서 자는 것을 보고 (왜 집에 들어가 자지 않고 풀밭에서 자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짐군들은 (40호 동네에서도 우릴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삼호동네에서 어떻게 우릴 받아들이겠니?) 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김상화는 즉시 집으로 달려가 밥을 짓고 있는 어머니에게 남은 밥이 없는가고 물었다. 어머니는 이상해서 무슨 일이 있는가고 물었다. 김상화는 일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김상화의 어머니는 아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얘야, 내가 밥을 더 지을테니 시름을 놓거라》고 말했다. 기뻐난 김상화가 밭으로 달려가 큰 호박을 뜯어오자 어머니는 호박죽을 끓여 짐군들을 대접하였다. 집군들은 떠나갈 때 너무도 고마워 상화와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드렸다.

 

1924년,김상화 일가는 왕청현 하마탕으로 이사왔다. 당시 진보적인 지식분자들의 영향을 받아 김상화의 사상 각오는 신속히 제고되였다. 1927년부터 그는 반제, 반봉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8년 그는 몇몇 혁명자들과 함께 하마탕에서 《호조동맹》, 《소년단》 등 혁명군중단체를 건립하고 야학교 등 각종 명의로 군중들에게 반제, 반봉건의 혁명도리를 선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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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화, 한영호 렬사의 머리를 효시했던 느릅나무
 1930년 5월, 중공동만특위에서는 동만(지금의 연변) 인민들을 영도해 성세호대한 《붉은 5월 투쟁》을 일으켰다. 룡정, 국자가(지금의 연길) 등지에서 노동자 파업, 학생휴교(学生罢课)운동이 전개되자 각지의 농민들도 분분히 일어나 경찰서를 습격하고 무장을 탈취해 혁명의 열화가 연변대지를 불태웠다.

 

김상화 등 동지들의 영도하에 당시 북하마탕의 농민들도 적극적으로 행동했는데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지주의 압박을 반대한다!》 등 구호를 높이 부르면서 일정한 규모를 갖춘 거리시위를 진행하였다. 분노한 농민들은 적수공권으로 총을 들고 시위를 제지하러 온 보위단과 박투했다. 김상화는 또 친히 《농민자위대》, 《반제동맹》, 《아동단》등 항일조직을 건립하였다.

 

《붉은 5월 투쟁》은 김상화를 정치상적으로 점차 성숙되고 견강하게 만들었다.

 

그해 7월, 공산국제의 《한개 나라 한개 당》 원칙에 근거해 중공연화중심현위에서는 김상화를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켰다. 입당 후 그는 하마탕 일대에 파견되여 당의 지하공작을 전개하였다. 9월에 설립된 중공하마탕구위는 김상화를 구위서기로 임명하고 10월에 중공 왕청현위를 설립한 후 원 연화중심현위의 하마탕 구위를 왕청현위에 귀속시키고 김상화를 하마탕구위서기로 임명하였다.

 

이 기간에 김상화는 농민 적위대와 김훈이 영도하는 유격대와 밀접히 배합하여 간첩 김예송을 처단하고 보위단 번역관 김동오를 처단하여 로고대중의 항일신심을 북돋우어주었다. 남하마탕에는 반광우라는 지주가 있었는데 간첩인 그는 하마탕 일대에서 나쁜 짓을 많이 해 군중들의 강렬한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날 김상화, 김훈이 인솔한 적위대와 유격대는 깜쪽같이 남하마탕에 와 반광우의 집부근에 매복해 있다가 반광우를 처단하여 반동세력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항일무장대오를 확대하였다.

 

1931년 1월 27일,중공왕청현위 제1임 서기 김훈이 불행하게 체포되자 갓 설립된 왕청현위는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이 관건적인 시각에 김상화는 김훈의 뒤를 이어 왕청현위 제2임 서기를 담임되였다. 그가 현위서기를 담임한 후 혁명형세는 더욱 악화되여 전 현의 백성들은 백색공포 속에 잠기게 되였다. 돈화에 둥지를 틀고 있던 국민당 제7퇀 퇀장 왕수당은 남대관, 권수정을 위수로 하는 반동세력과 결탁해 동만 각지에서 야만적인 토벌을 감행하였다. 김상화 등 동지들은 하는 수 없이 심산밀림으로 전이해 비밀리에 항일활동을 진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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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은 이 작두로 김상화렬사의 머리를 잘랐다.
 

1931년 2월 1일 밤, 김상화는 적위대의 무장력량을 확대하기 위해 비밀리에 산에서 내려와 먼저 영안툰에 있는 여동생 김순옥의 외양간에서 밥을 먹고 밤길을 헤치며 대방자 촌으로 갔다. 2월 2일 새벽, 600여명 되는 일본토벌대가 갑자기 북하마탕 대방자촌을 포위하고 한집 한집씩 수색하였다. 김상화는 대방자 사호동의 김덕이네 집에서 북하마탕지부서기 한영호와 어떻게 적위대의 무장력량을 확대할 것인가에 대해 연구하다가 적들에게 발견되여 불행하게 체포되였다.

 

적들은 대방자촌을 전부 수색한 후 전 촌의 촌민들을 보위단 울안으로 몰아낸 후 먼저 여성과 아동, 노인을 놓아준 후 나머지 청장년들은 지주 구대우네 집으로 끌고가 한사람씩 심문했는데 김상화가 첫 번째로 심문을 받았다.

 

《공산당원인가》, 《경상적으로 함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등 심문에 김상화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성이 상투밑까지 치밀어 오른 적들은 《적위대가 어디에 있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김상화는 의연히 침묵을 지켰다. 적들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빨리 말해, 누가 공산당원이냐?》 하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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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호 열사 묘는 2012년 10월 1일, 왕청현인민정부에 의해 이장되였다.
 김상화는 적들을 쏘아보며 의연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잔인한 적들은 고문으로 김상화의 견강한 의지를 꺾으려고 형벌을 들이댔다. 적들은 김상화의 두 엄지손가락을 쇠고리에 끼워 나무에 매달고 혹독하게 때렸다. 두 손가락은 뼈까지 드러났으나 그는 의연히 당의 비밀을 한마디도 누설하지 않았다.

 

적들은 고춧가루 물을 그의 코 구멍에 부어넣고 손톱눈에 참대바늘을 찌르는 등 참혹한 형벌로 김상화를 괴롭혔다.

 

1931년 2월 5일, 김상화 한테서 아무런 비밀도 얻어내지 못한 적들은 사방산 밑에서 김상화를 살해한 후 작두로 김상화와 한영호의 머리를 잘라 대방자촌 중심에 있는 느릅나무에 달아 효시하였다. 하마탕 항일군민들은 적들의 위협에도 굴함없이 민족의 해방사업을 위해 열사들의 피어린 발자취를 따라 항일투쟁을 계속 진행하였다.

 

해방 후 왕청현 당조직과 인민들은 김상화 열사를 잊지 않았다. 김상화 열사의 위대한 업적을 후대에 영원히 남겨주기 위해 2007년 7월 1일, 왕청현 정부에서는 후하촌 입구에 김상화 열사비를 수선하고 2013년 5월에 60여만원을 투자해 열사기념비를 400평방미터로 확장하였다.

 

김상화, 동만지구의 저명한 조선족항일전사는 자기의 실제행동으로 불요불굴의 견강한 의지를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왕청 인민들의 자랑, 우리민족의 영웅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리강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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