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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뉴스

건나물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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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1-04-18 01:32 조회988회 댓글0건

본문


지난해 신정 날, 나는 한국에 온지 2년만에 아내와 함께 고향에 설 쇠러 갔다. 2년 전에 간암으로 형수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고향에서 혼자 계시는 큰형이 외롭게 설을 쇠는 것이 마음에 걸려 서다.

 

나는 큰형과 설과 보름까지 즐겁게 쇠고 인차 한국에 나가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우리가 고향에 발을 붙이는 그날부터 무한에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신종코로나폐염(실제로 2019년 12월 말에 발생하였지만 정부에서 그 병명을 확인되지 않아 1개월이 지나서 소식통에 공포하고 급기야 전국적으로 봉쇄를 시작했음) 이 발생하고 잇달아 유럽, 동남아, 남아프리카 등 세계 일부 나라에서도 발생하더니 급기야 전 세계로 재빨리 확산되었다.

 

신문과 TV, 방송 등 모든 보도매체에서 날마다 특대뉴스로 코로나에 걸려 오늘은 확진 자가 얼마 나왔소, 어제까지 얼마 죽었소, 하며 사람들을 공포와 불안 속에 떨게 했다.

 

잇달아 나라와 나라사이 국경이 봉쇄되고 하늘길과 배길이 끊어져 서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였다. 뿐만 아니라 성과 성, 시와 시, 심지어 마을과 마을끼리 통행이 금지되고 봉쇄하다 보니 모든 상태가 고립되었다.

 

신종코로나폐염이 하루 이틀에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점점 장기화로 이어지면서 나와 아내는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 못했다. 월세를 다달이 주인집 계좌에 입금시켜야 하고, 전기세, 도시가스비도, 관리비도 다달이 물어야 하고... 하여튼 골치 아픈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나는 매일 여러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비행기가 언제 뜨는가를 물었고, 그때마다 여행사들도 한결같이 자기들도 언제 비행기가 뜰지 모른다는 대답뿐이다. 나는 인터넷으로도 알아보았지만 그 상이 장상이다. 이젠 막무가내로 무작정 집에 처박혀 방콕족으로 살면서 비행기가 뜨기만 학수고대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하루가 1년 맞잡이로 지루하고 지겨운 나날이 시작 되었다.

 

그렇게 하루, 1개월, 8개월을 집에서 방콕족생활을 하다가 차츰 전국적으로 신종코로나페염이 소강상태를 보이고 건강QR코드(龙江建康吗)가 도입되면서 외성과의 출입이 자유로워지고 또 하늘길이 차츰 열렸지만 가목사~제주도항공편은 언제 하늘길이 열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요행으로 지난 9월 4일, 오전 10시 25분, 청도~인천공항편 티켓을 사게 되었다.

 

나와 아내는 그 이튿날 현성으로 가서 여행용 가방과 대추, 구기자, 오미자, 불개미 등 한국에 가서 먹을 약재를 사고 필요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내는 한국에 가면 14일간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데 그동안 집에 갇혀 까딱 문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만약에 위반하고 문밖에 나오면 300만 원이상, 1000만 원이하 벌금하고 1년이상 형사처벌하고 외국인은 강제추방 한다고 하면서 한국에 가서 자가 격리하는 동안 먹을 반찬을 많이 준비해서 가지고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매일 마을과 3리 떨어진 농장 시장에 가서 가지며 류월콩(六豆), 풋고추, 무, 가지, 등 풋채소를 사다가 썰어 말리고 미꾸라지와 잔잔한 붕어도 사서 말렸다. 내가 먹지도 않는 건나물을 말린다고 한사코 말렸지만 아내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드디어 우리 부부는 지난 9월 3일 가목사에서 850원을 주고 비행기를 타고 청도에 내려 이튼 날 10.25분에 청도에서 인천공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한국시간으로 12시 5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우리 부부는 공항에서 근 4시간을 걸려 모든 입국절차와 검역직원이 핸드폰에 앱 코드를 깔아 주고 검역확인증을 받아 쥐고 무사히 공항에 빠져나왔다. 우리는 곧바로 수원행 리무진버스를 타고 1시간을 달려 우리가 집을 잡고 있는 호텔캐슬종점역에 하차했다.

 

벌써 구보건소에서 파견한 차가 우리를 대기하고 있었고 차는 우리를 곧바로 집 문 앞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때 시간이 저녁 6시다. 그때부터 우리는 철저한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우리 내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짐을 풀 새도 없이 심한 허기를 느꼈다. 배가 고팠던 것이다. 아침에 청도공항에서 컵라면으로 아침을 대충 먹고 기내에서 주는 량에도 차지 않는 빵 쪼가리로 점심을 때웠더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를 내며 나를 향해 신호등을 켜고 있다.

 

마침 고향에 갈 때 먹다 남은 쌀과 소금, 간장, 미원, 콩기름 등 양념이 있어 다행이다. 그런데 반찬거리를 아무리 뒤져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다. 아내는 재빨리 전기밥솥에 밥을 안치고 짊을 풀어 말려간 가지와 풋고추를 물에 20분 정도 담갔다가 기름에 각종 양념을 넣고 가지를 볶고 풋고추도 볶아 그런대로 두 가지 건나물 반찬으로 저녁상을 뚝딱 차렸다. 몇십년만에 처음 대하는 건어물 반찬에 밥을 먹으려니 자존심이 구겨지고 목구멍으로 넘어나 갈까 하고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먹지 않을 수 없었다. 배에서 자구만 꼬르륵 소리를 내며 난동을 부린다. 할 수없이 밥에 건 나물 반찬을 올리고 한술 떠먹었더니 아니 이게 웬 떡이냐?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반찬도 있었나할 정도로 너무너무 맛있어서 두 접시 반찬을 하나도 남김없이 게 눈 감추듯 박박 긁어 먹었다. 그 이튼 날도 그 다음 날도...

 

역시 굶주린 자에겐 음식에 꿀맛이 따르고 배부른 자에겐 식상(食伤)함이 오는 것이다. 내가 원래부터 건나물을 안 먹은 것은 아니라 잘 먹었고 없어서 못 먹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전국적으로 3년 재해를 금방 겪었고 잇달아 대 약진이 이어지면서 온 나라가 하나같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집집마다 멀건 나물죽과 풀뿌리로 끼니를 에웠고 후에는 나물과 풀뿌리마저 없어서 소나무 속껍질을 발라 먹고 옥수수이삭 속갱이도 가루 내어 먹었다. 많은 사람들이 굶어서 죽어 나갔고 산사람은 부종과 변비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때는 나는 언제 한번 옥수수밥에 건 나물 반찬이라도 배불리 먹어보았으면 했고 그 위에 더한 사치가 있었다면 잔칫상이나 제사상위에 빠지지 않고 놓이곤 하는 삶은 계란 까놓은 것을 언제 한번 실컷 먹어 보는 것이었다.

 

3년 재해와 대 약진의 먹구름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국민생활이 차츰차츰 허리를 펴게 되었고, 특히 개혁개방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자 국민생활에 천지개벽을 가져왔다. 시장에는 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등 육류와 전에 보지도 못했던 싱싱한 풋 채소들이 1년 4계절 철철 넘쳐났다. 집집마다 때마다 하얀 입쌀밥에 여러가지 고기볶음과 싱싱한 풋 채소 반찬이 밥상을 모두 점령하자 건 나물 반찬은 밥상에서 차츰차츰 사라지고 후에는 아예 사라져 그 맛도 잊은 지 아득한 옛날이다.

 

넘치면 모자람 보다 못하다고 했던가 무엇이나 풍성하고 차고 넘치니 요사한 미각이 맛을 알고 맛나는 음식에만 길들어지고 그것도 상다리 부러지게 한상 차려 놔도 입맛에 당기는 음식이 없다고 투정질이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소시지와 고기를 먹기 싫다고 끙끙거리는 요즘 세월에 고급동물인 인간의 미각을 더 말해서 뭘하랴.

 

아직 자가격리가 끝나자면 일주일 남았다. 나는 매일 건나물 반찬을 맛나게 먹고 그 맛에 자가격리에 대한 지루함도 잊고 집에 있다. 몇 십 년 만에 잃어버린 맛을 이제야 되찾은 것 같다.

 

이제 자가격리가 끝나면 시장에 가서 먹고 싶은 고기나, 싱싱한 해산물과 풋 채소를 사서 먹겠지만 건 나물 반찬만은 때마다 밥상 한중간에 턱하니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다.

/수원시 허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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