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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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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1-03-13 13:38 조회1,1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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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회에는 수염을 기른 노인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어쩌다 거리에서 수염이 텁수룩한 노인을 보면 몸 건사도 깨끗하게 할 줄 모르는 추한 노인으로 생각하게 되고 혹시 정신이 이상한 노인이나 거리를 헤매는 노숙자가 아닌지 하는 생각에 한 번 더 바라보게 된다.

 

내가 어릴 적 만해도 노인들은 무조건 수염을 길렀고 그런 노인이라야 할아버지로 보였다. 수염이 없는 노인에게는 할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할아버지는 내 할아버지이고 집안의 할아버지이며 동네 할아버지요 모두의 할아버지였다.

 

지금 양로원이나 노인 협회를 찾아가도 수염을 기른 노인을 찾아볼 수가 없다. 모두가 하나같이 혹간 머리는 흰데 턱이 민숭민숭 하거나 머리에 염색을 해서 까만 머리에 턱수염이 희끗희끗 비칠 뿐인 노인 들 뿐이다. 옷매무새나 몸매며 얼굴 표정, 걸음걸이를 봐도 노인은 분명한데도 할아버지 같지가 않다. 모두 수염이 잘려 까칠까칠한 턱, 손자, 손녀들이 만져보고는 따갑다고 기겁을 할 턱들이고 매일 면도를 해서 수염을 찾아볼 수가 없는 턱들이고 얼굴들이다.

 

지난해 봄, 나는 고향을 떠난 지 13년 만에 고향 마을에 들렸다가 마을의 20여명 되는 노인들을 몽땅 음식점에 청해 대접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떤 노인은 머리가 백발이었고 어떤 노인은 머리에 염색을 해서 까만 머리였는데 하나같이 턱과 얼굴에는 수염이 없다. 내가 응당 마을의 최 연장자 노인에게부터 술을 따라 드려야 마땅한데 이리저리 노인들의 얼굴을 살펴보아도 도대체 어느 노인이 연장자 노인인지 분간하지 못해 잠깐 생각을 굴리다가 나와 가까이 앉은 노인부터 차례로 술을 따르고 말았다.

 

나이 들어 흰 머리, 하얀 수염은 생로의 순리임을 누가 모르랴만 옛날 시대의 노인들과 현대사회에서 사는 노인들의 생각과 인식, 취미가 많이 변하고 사람의 수명도 많이 길어져 지금은 100세시대라고 하는데 누군들 늙는 것을 좋아하고 늙은 티를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하여튼 옛날의 로인 들은 백발에 한 뽐씩 긴 은발 같은 턱 수염을 내리 쓸고 노인의 고결한 풍도와 위엄을 과시한 것만은 사실이었다면 신사다운 정장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다니거나 깨끗한 옷차림에 백발에 까만 염색을 하고 수염을 기르지 않고 매일 면도를 하여 조금이나마 젊어 보이고 젊음으로 살아가려는 것 또한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요즘 노인들의 풍도이며 사회의 풍조인 것 또한 사실이다.

 

노인의 수염은 나이 든 남자들에게 주어지는 조물주의 선물이요 자연의 섭리이다. 하얀 수염은 나이가 있고 어른이 되었다는 표정이고, 온갖 세상 풍상을 다 겪었다는 증거요 일의 선후를 가릴 줄을 알고 그 무게를 가늠하고 사람이 사는 도리를 알 만큼은 안다는 증거요 삶의 도가 되였다는 표징이다.

 

남자가 남자답지 못한 짓을 하면 수염이 나지 않고 있던 수염도 떨어 질것이라고 한다. 영화나 TV연속극, 혹은 책에서 나타나는 도인이나 은사는 하나같이 백발에 은발 수염을 날리는 노인 들이고, 군사를 거느리는 대장군이나 힘장사 호한들은 모두 8자수염이나 혹은 구레나룻이 텁수룩하고 턱수염은 유난히 검고 굵으며, 궁중의 내시는 수염이 없고, 성격이 괴팍스럽거나 까탈스러운 사람의 수염은 염소수염과 흡사하며, 간신배들의 수염은 거개가 개수를 알 정도로 묘사되어 있다.

 

수염이 많고 적음을 어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랴. 유전 인자의 섭리이다.

 

옛날, 수염이 텁수룩한 노인의 말 한마디면 가정에서나 마을에서는 법이고, 질서였고 노인들은 가는 곳마다 존대와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현대라는 핵가족 시대에는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를 갈라놓고 사랑과 정을 주고받을 권리와 의무마저 포기하거나 박탈당하게 만들었고, 사회에서도 더는 할아버지가 아닌 늙은이로 남는 존재가 되여 노인의 설 자리마저 점점 잃어져 가고 있다. 오죽하면 요즘 사회에서 '늙으면 불중용이다(不重用' 혹은 '요즘 모든 물가는 자고 나면 하늘이 높은 줄 모르고 오르지만 늙은이들의 '값 '은 자고 나면 내려간다.' 는 말이 유행어처럼 자주 듣게 된다.

 

'나 늙어 노인 되고 젊어서 나였으니 나와 노인 따로 없다 '는 글귀가 왜 쓰이게 되였는가를 생각하게 되고 더욱이 할아버지의 수염을 만지기는커녕 보지도 못한 요즘 어린이들의 먼 훗날에 꿈속에 나타날 할아버지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가 궁금해진다.

 

요즘 3무지기 텃밭을 가꾸는 일로 연 며칠 동안 면도를 하지 않아 코 수염, 턱수염과 구레나룻으로 온 얼굴에 수염 투성으로 꺼칠꺼칠 하게 자랐다. 워낙 털보인 내가 수염을 기르면 제법 텁수룩할 수염이다. 아예 이참에 칼-맑스처럼 수염을 길러 보겠다는 말에 집사람이 기겁을 한다. 이웃집의 손녀가 나를 보더니 '할아버지 얼굴에 머리가 났다.' 며 이상한 눈길이다. 모두 늙어 보이는 것이 싫은 거겠다. 하긴 요즘 노인들마저 수염 기르기를 싫어하고 늙어 보이기를 싫어하는 마당에...

 

급기야 얼굴에 비누칠을 하고 면도를 깔끔하게 하고, 머리를 감고 기름까지 바르고 거울을 들여다보니 나 보기에도 10년은 더 젊어 보인다.

 

그렇다. 내가 지금 텁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할아버지로 얼마간의 위엄을 갖췄다고 한들 이미 실종되고 박탈당한 할아버지의 위치와 권위를 어디 가서 다시 찾는 단 말인가?

/수원시 허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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