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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붓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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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1-02-06 14:33 조회1,3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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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녕 환인 현성에 한평생 교육사업에 바쳐온 김내진 선생과 서춘화 사모님은 배다른 자식 4남매를 선후하여 대학에 보내 사람들의 부러운 눈길을 모으며 칭송을 받아온 양주이다.

 

1971년 서춘화는 아홉 살잡이 아들 박성환을 데리고 와니전자촌 김내진의 문턱을 넘어섰다.

 

“향아, 엄마, 엄마라 해.”

 

김 선생은 미리 자기 딸애를 단속하였었지만 낯선 여자를 보자 ‘와-’하며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러자 방구들에 오도카니 앉아 경우를 살피던 경희도 따라 울었다.

 

“애들아, 울지 마, 엄마 왔다. 엄마.”

 

그녀는 과일을 꺼내 우는 향희 손에 들리고는 어린 경희를 품에 안겼다.

 

“여보, 우리 집에 들어오면 맘고생이 막심할거요. 우리 같이 손잡고 애들의 참다운 아버지, 어머니로 되기요.”

 

김 선생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새 삶을 영위해 나갈 것을 약속하였다.

 

‘여보세요. 아버지 없는 애도 불쌍하지만 어머니 잃은 애들이 더 생기 없고 불쌍하잖아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소.’

 

김 선생은 또 한 번 서춘화의 손을 꽉 잡았다.

 

김내진 선생은 일찍 신빈조중을 졸업하고 화동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환인조중으로 전근하였다. 1969년 환인조중이 해체되자 와니전자소하교로 내려와 교편을 잡게 되였다.

 

그렇게 부대끼던 와중에 본처가 네 살 난 경희를 두고 병사하자 김 선생은 어린 자식들이 가엾게 생각되어 31살의 서춘화를 후처로 맞아들였다.

 

어느 날 밤, 경희를 품에안고 자리에 누운 그녀는 잠결에 흐느끼는 소리에 소스라쳐 깨여났다. 자기 핏덩이 성환이었다.

 

“왜 우니? 어디가 아프냐?”

 

아들 성환이를 달래며 영문을 물었으나 애는 그저 울기만하더니 끝내 혀 아래 소리를 했다.

 

“향희, 경희는 어마 아빠 곁에서 자고, 난...”

 

“?!”

 

서춘화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자식에게 무거운 죄를 진 듯 한 심정이었다.

 

김 선생은 잠기를 쫓으며 한마디 께끼였다.

 

“성환아, 넌 큰애가 아니니 울기는.”

 

남편의 악의 없는 말이지만 그녀의 마음은 가슴에 에이는 듯 쓰려났다. 얼마나 불쌍한 아들인가? 이제라도 봇짐을 싸들고 이 집을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편에게 미안했고 어머니의 사랑을 잃은 애들이 불쌍하였다.

 

“여보세요, 성환이도 어머니품속에서 자고 싶지 않겠나요?”

 

“그렇지, 내가 이자 말을 잘못했소! 여보, 내 친자식처럼 갸를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겠소. 꼭!”

 

이튿날부터 김 선생은 밤마다 밥상을 펴놓고 이붓자식 박성환의 학습을 지도하여주었다. 한족마을에서 자란 성환이는 언어생활에서 조선말을 접촉 못하였기에 김 선생은 그에게 자모부터 익혀주었다. 성환이가 학습 성적이 올라가고 3호학생으로 당선될 때면 김 선생은 그렇게 기뻐하며 장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성환이가 6학년 때 김 선생은 딸자식을 보아 다섯 식솔이 여섯으로 늘어 워낙 궁한 살림은 더 쪼들렸다. 하여 김 선생은 학교 양돈장까지 도맡았다 지친 몸으로 집에 와서 낡은 옷을 갈아입고는 양돈장에 나가 밤을 패군 하였다. 그렇듯 하루 이십 전을 더 벌겠다고 발버둥을 치였다. 설대목이면 집집마다 돼지를 잡는다고 설치지만 가난한 선비 김 선생은 닭 한 마리 잡을 형편이 못 되였다. 동료들 호주머니에는 뭉칫돈이 불룩하지만 김 선생 호주머니에는 수첩뿐이었다. 그 수첩에는 한 달 경제 분배를 적어야 하였다.

 

1978년 맏아들 성환이가 중학에 진학하자 김 선생의 생활은 더 말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느닷없이 김 선생의 위병마저 발작하였다. 하지만 그는 다달이 봉급에서 넉넉히 떼 내어 성환이 손에 들려주었고 자기는 소다가루로 아픈 위를 달래군 하였다

 

“성환 아버지, 큰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세요.”

 

“향희 어미, 내 병은 고질병이여서 소다가루면 다요.”

 

“그리고 여보, 이번 달 월급이 나오면 구두라도 한 켤레... 내가 동네분들을 볼 면목이 없어요.”

 

“향희 어미도 참, 이 비닐신이 어떻소. 신기도 간편하고 비 올 땐 씻기도 쉽고...”

 

“학생들 앞에 나서는 몸이 그래서 어찌나요.”

 

“당신도 알다시피 이번 달에 성환이 신을 사주어야지 여름에도 운동화를 신고 다니니 말이 아니지. 그리고 집에 있는 애들도.”

 

1982년 박성환은 대학시험에서 낙방되자 고개를 떨구고 말하였다.

 

“아버지, 이젠 나는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짓겠어요. 가정도 곤난한데...”

 

“뭐? 농사를 짓겠다고? 그럴 수 없다. 성환아, 절대 맥을 놓지 말고 명년에 또 한 번 겨루어보아라.”

 

김 선생은 성심성의로 말했다. 일찍 철이 든 박성환은 아버지의 사랑에 새 힘을 얻어 학습에 전력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1983년 박성환은 괴마자진에서 처음으로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았다.

 

동북사범대학입학통지서가 산간마을에 전하여지자 동네사람들은 제일처럼 몹시 흥분되어 김 선생의 두 칸 초가집이 메여지게 모여들었다.

 

“댁에서 대학생이 나왔지요.”

 

“김 선생, 정말 대단한분이구만.‘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치송하고 부러워하였다.

 

“어머니, 나도 오빠처럼 대학 갈래요.”

 

중학 일학년에 다니는 향희는 제 어미 목을 끌어안고 애원했다.

 

“엄마, 나도.”

 

경희도 볼을 살살 어루쓸며 재잘거린다.

 

“그래 우리 향희, 경희, 옥희 모두 대학 가야지...”

 

서춘화는 가끔 허기증과 어지럼증에 모대기다도 모락모락 커가는 자식들을 보면 즐겁기만 했다. 하기에 남들이 쉴 때도 그는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여름이면 들일을 마치고 갖가지 덩굴이 얼기설기 뒤엉킨 산속을 뚫고 다니면서 약 뿌리를 캐고 산나물을 뜯었고 겨울이면 낫과 새끼 토래를 들고 산속에 들어가 싸리를 베고 그것을 묶어 등짐으로 메여 날랐다. 정말 이 동네에서 산등을 많이 넘나든 사람은 그녀였다. 이렇게 그녀는 푼돈을 모아 자식들의 옷가지를 사주었다.

 

그녀는 향희, 경희에게 각별히 잔 사랑을 몰 부었다 동네사람들이 현성에 가면 통졸임병에 콩장과 비닐주머니에 찹쌀밥을 담아서 향희에게 보냈고 남편 모르게 이따금 향희 호주머니에 잔돈을 넣어주었다. 지어 햇감자, 풋 강냉이가 나오면 우리 향희에게 보내겠다고 정류소에 나갔다.

 

향희도 일요일 집에 돌아오면 부엌에서 허둥지둥하는 어머니의 일손을 도우려 팔소매를 걷어지르고는 부엌으로 내려가군 했다.

 

“향희야, 그만두어라. 어서 방에 올라가 공부나 하거라.”

 

언제나 입버릇처럼 외우는 어머니의 말 이였다.

 

1988년 김향희는 요녕대학입학통지서를 받았다. 서춘화는 떠나는 딸에게 떡 한입 더 먹이고, 옷 한 벌 더 해주려고 팽이처럼 바삐 돌아쳤다.

 

향희가 대학으로 떠나는 전날 밤 서춘화는 부엌에서 울었다.

 

“여보, 이 기쁜 날에 울기는. 어서 구들에 올라가 향희와 말이나 하오.”

 

그녀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고는 남편 따라 구들에 올라갔다.

 

“엄마-.”

옷가지를 차곡차곡 개어놓던 향희는 어머니의 장알 박힌 손을 끌어다 자기 무릎위에 놓았다. 15년 동안 쟁기 쥐고 풍상고초 겪을 대로 겪은 손, 얼마나 억척스레 일을 하였으면 손톱 밑이 다 까풀이 까츨하게 일어나 있을까?

 

“향희야, 이 돈을 잘 건사해라.”

 

“엄마-”

 

정찬 부르짖음과 함께 향희는 어머니의 앞가슴에 머리를 파묻었다. 뜨거운 두 줄기 눈물이 어머니의 볼을 적시였다. 그녀는 흐느끼는 향희의 눈물을 훔쳐 주었다.

 

“향희야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라.”

“엄마, 이 입학통지서엔 엄마의 정성이...”

 

향희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흐느꼈다.

 

이튿날 새벽, 그녀는 이불 짐을 머리에 이고 향희를 앞세우고 정류소로 나갔다. 벌써 동네분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한참 후 뻐스가 정류소에 들어섰다.

 

여느 때라면 서로 뻐스에 오르겠다고 앞다투련만 오늘은 승객들이 일렬종대로 늘어서서 이붓어미 손에서 대학생이 된 향희가 먼저 뻐스에 오르기를 기다렸다.

 

“엄마, 잘 있어요.”

 

“오,향아.”

 

어머니의 가슴속서 뜨거운 것이 욱 치밀어 올랐다. 뻐스는 서서히 떠났다. 그녀는 따라가며 손들어 젓고 또 저었다.

 

1987년 7월, 김 선생은 환인조중으로 전근 되였고 서춘화는 환인현 진소학교탁아소의 보육원이 되었다.

 

그해 성환이가 결혼하게 되여 김내진은 두간 초가집을 판 밑천마저 다 밀어 넣다보니 남은 것이 두 주먹뿐이었다.

 

“죽을 먹더라도 애들을 끝까지 공부시키겠다.”

 

서춘화의 입버릇처럼 외우는 말이였다. 그녀는 생각 끝에 자금이 많이 들지 않고 임시 돈을 벌수 있는 짠지 장사를 하려고 탁아소보육원을 그만두었다. 밤마다 그들 부부는 하루의 피곤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라지 찢고 마늘을 발랐다. 그때만 해도 사모님들이 장사에 나서는 일이 드물었다. 서춘화는 남이야 뭐라 든 상관할 바 아니라 생각했다. 오직 돈 벌어 자식들 공부시키려는 일념뿐이었다.

 

하루 저녁 서춘화는 정식해 남편을 불렀다.

 

“여보세요, 열흘 동안 번 돈 이예요. 며칠 전 향희가 한문사전을 사겠다고 돈을 부쳐달라고 하였는데 내일이라도 부쳐주세요.》

 

“경희 어미, 우리같이 유족하지 못한 형편에 어찌 남이 사는 걸 다 사겠소. 도서실에는 사전도 있겠는데.”

 

김 선생의 사려 깊은 대답이었다.

 

“성환 아버지, 향희가 학습에 꼭 필요해서 사겠다고 했잖아요. 내가 좀 더 부지런하며 되지 않나요.”

김 선생은 아내의 말에 깊이 감동됐다.

 

1989년 8월, 셋째인 경희가 대련외국어학교의 입학통지서를 받았다. 김내진댁의 또 하나의 경사였다. 막내딸 옥희는 연방 ‘만세’를 외치며 환성을 올렸다. 본계시농업은행에서 사업하는 아들도 축하하려고 그날 저녁차로 들어섰다.

 

“여보세요, 내가 올 때에는 경희가 삿자리에서 벌벌 기어 다니더니 오늘은 대학생이 되었지요.”

 

배다른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구분 없이 아이 넷이 친형제처럼 스스럼없이 다정하게 지냈다.

 

아들 박성환은 본계시농업은행에서 주임으로 사업하고 김향희는 본계시조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김경희는 요녕성경공업수출입회사에서 사업하고 본계시사범대학을 졸업한 김옥희는 현성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자식들의 맘속에는 이붓 어머니라는‘성’을 바뀌어 친어머니로 된 서춘화는 늘 이렇게 말했다.

 

“애들이 날 친엄마처럼 따르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더구나 자식들이 다 출세했으니 말이요.”

/신석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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