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바꾼 추억의 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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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3-07-25 19:22 조회35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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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이란 참으로 독특하다. 내가 한국에서 이렇게 오래 생활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한국에서 자신의 노후를 다 바쳐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전에 중국에서 생활하던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전에 나는 중국에서 넓은 마당을 가진 단층집에서 살았고 직장에 근무하면서 취미로 마당에 야채도 심고 꽃도 가꾸면서 아침저녁으로는 어린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가고 데려오곤 했다.
남편은 차량정비업체를 경영했는데 수입이 괜찮아 돈은 그렇게 여유를 부릴 정도는 아니였지만 계획적으로 요리조리 맞춰가면서 쓰고 조금씩 적금도 들 수 있는 정도여서 부자는 아니였어도 남들이 부럽지 않게 오붓하고 단란하게 살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남편은 “우리 집 식구들은 그 누구도 외국 나들이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은 만족이 없는 것 같다. 집도 없이 셋방살이 하면서 살던 주위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 목돈을 벌어다 아파트를 사고 자동차도 사는 모습을 보고 나도 노후를 행복하게 보내려면 외국으로 나가야 겠다는 생각에 한국어 능력 시험을 치르고 2008년에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대한민국에 와서 제일 기뻐했던 것은 우리가 같은 한민족이라서 언어가 통하는 것이였다. 한국인들은 길을 물으면 친절하게 알려주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목적지까지 함께 동행해서 알려주기도 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름 모를 그분들을 잊지 않고 되새겨 보군한다.
그보다도 더 좋은 것은 본인만 부지런하면 일자리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입국해서 처음으로 식당에 취직했다. 식당은 밥만 사먹는 곳인 줄 알았지 식당일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왕초보라서 수저 놓는 것부터 시작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배워가면서 일 해야만 했다.
우선 출근해서부터 해야 할 일은 주방 그릇, 야채이름, 이런 모든 걸 외우는 것이였다. 나는 매일 메모지에 이런 내용들을 기록해 놓고 일하면서, 출퇴근하면서 꼭꼭 몇 번씩 읽으면서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홀 서빙을 배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주방장 자리가 비면서 사장님께서 저더러 요리를 배워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요리는 한 번도 배워 본적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사장님은 60대 후반인 중년여성이었는데 예술단 출신이라 춤도 잘 추고 요리도 잘 하셨다. 사장님께서는 자기가 배워주겠으니 노력만 하면 될 것 같다고 하셨다. 원래 배움에 욕심이 많은 나인지라 그 자리에서 후라이펜에 쌀 한줌을 놓고 돌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후라이팬을 두 손으로 들어야 들 수 있을 만큼 힘이 없었다. 야채도 썰면 길이, 두께가 균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칼질하는 소리 자체부터 아니였다. 나는 후라이팬을 돌리고 또 돌려보기도 하고 깍두기를 담그고 남은 무 껍질로 칼질 연습했고 밖에 나가 풀을 뜯어다 썰어 보기도 했다. 쉬운 요리는 사장님께서 가르쳐 주는 대로 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건 탕수육이였다. 한국인들은 탕수육을 너무 좋아 하셨는데 나는 탕수육을 좀만 더 튀기면 딱딱해지고 조금 덜 튀기면 끈적거리고 하여 별로 맛을 내지 못했다. 고기를 튀기려고 집어넣을 때에는 180도가 되는 식용유가 얼굴, 손등, 팔에 튀여서 상처가 날에 날마다 늘어만 갔다.
계속 이렇게 하다가는 탕수육을 튀기는 게 아니고 내손을 튀기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들이 많을 때에는 바쁜 줄도 모르고 일을 했는데 좀 한가할 때에는 외롭고 쓸쓸한 마음 달랠 길 없어 멍하니 창밖을 내다 본적이 한 두번이 아니였다. 나는 화상자리가 아파날 때마다 고향생각, 집식구들 생각이 구름처럼 밀려오고 요리를 배워낼 수 있을ㄲ? 하는 걱정도 태산 같았다. 하여 퇴근하면 혼자 가게에서 밥상을 밀어놓고 잠을 잦는데 가게가 큰길 사거리에 위치해 있어서 밤이면 목탁을 두드리면서 돈 달라고 하는 사람. 한 밤중에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싸우는 사람, 술에 취한 사람들이 휘청거리며 중얼대는 말소리가 들리는가하면 또 한 번은 중학생쯤 돼 보이는 남자애들이 식당금고를 털려고 식당 문을 뿌셔서 경찰들이 출동한 적도 있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사시나무 떨듯 하면서도 무섭다고 일을 그만 둘 수도 없고 또 오로지 돈을 벌어 노후를 행복하게 보낼 목적으로 무서움도, 외로움도, 피곤함도 모든 걸 다 참아가면서 힘겨운 세월을 버텨야만 했다.
나는 후라이 팬에 쌀을 놓고 돌리고 또 돌리고 무 껍질을 썰고 또 썰고 책에다 요리이름을 하나씩 적으면서 악착같이 일을 배워냈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주가 지나고 날이 가고 달이 차면서 나는 한국 정착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웠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가끔씩 요리가 맛있다면서 팁을 주는 손님들도 있었는데 이럴 때에는 비록 많은 돈은 아니지만 마치 운동선수가 금메달을 따낸 기분이였다.
한국에 와서 고군분투한 처음 3~4년은 오천원 짜리 옷도 안 사 입고 머리 자르는 돈마저 아끼려고 거울을 보면서 혼자 머리를 자르기도 했다. 그리고 일체 가족모임, 친구모임은 참가금지라고 책장의 첫 페이지에 덩그렇게 써놓았다.
이렇게 힘든 타향살이의 설음을 느껴 보았고 갖은 풍상고초를 체험을 해보았다. 지금 와서 뒤돌아보면 혈기왕성했던 청춘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하얀 머리카락이 온 머리를 덮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목표를 위해 달려온 15년 동안 나는 많은걸 배웠고 많은 인생 공부를 했다. 맨발로 두 주먹 불끈 쥐고 달려온 15년, 나에게는 영원히 잊혀 지지 않는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조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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