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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하얀 떡국에 담긴 엄마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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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4-04-17 10:32 조회543회 댓글0건

본문

엄마는 생전에 설날 아침에 먹는 하얀 떡국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으셨다.

철이 들어서부터 믿으셨나? 아니다. 중국인 마을인 중국 송강성 동녕현 펴우골에서 1920년 5월 2일 태여난 엄마(리영숙)는 20세 전에 떡국을 구경도 못하셨다. 그래서인지 엄마의 운명은 20세 전까지 기구했다고 하셨다.

아들만 바랐던 가문에 딸로 태어났고 또 못나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구박속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16세 때 한마을의 총각한테 시집가셨다.

시집 식구들도 엄마가 못났다면서 구박했고 게다가 시집온지 3년 넘었으나 임신하지 못해 쫓겨났다.

이런 엄마를 친정에서도 좋아할리 만무했다. 얼마 지나 매부의 알선으로 새로운 혼처가 생겼다. 외할아버지는 사위감을 만나보지도 않고 혼사를 허락하셨다.

그런데 생각밖으로 찾아온 남편은 미남이었다. 훤칠한 체격, 곱슬머리에 정기 도는 부리부리한 큰 눈, 인자함이 폭 담긴 길쭉한 얼굴, 그 어디를 봐도 엄마한테 어울리지 않았다.

이런 남자한테 시집가면 구박받을 것은 강건너 불 구경하듯 뻔하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이 모든걸 개이치 않으셨다. 엄마도 속으로 생각을 굳혔다.

"하루를 살다 쫓기우더라도 미남 남편과 살아보자!"

엄마는 작은 옷 보따리를 들고 신랑을 따라 100여리 떨어져 있는 동녕현의 노흑산 산골에서 살고 있는 시집으로 가셨다.

시집식구들은 엄마를 친정 부모처럼 미워하지는 않고 반갑게 맞았다. 엄마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다.

얼마 후 해마다 찾아오는 설날을 시집에서 처음 맞았다.

설날 아침 상은 친정마을과 달리 여러가지 요리가 오르지 않고 식구들 앞에는 국 한 사발씩 놓였다.

엄마가 바로 국을 떠 먹지 않고 바라만 보자 할머니께서 알려주셨다.

"조선에서는 설날 아침이면 이걸 먹는데 이것은 떡국이란다. 떡국을 먹으면 한 해를 무사히 지낼수 있다."

엄마는 시어머니의 말씀대로 한 해의 무사를 바라며 떡국 한 사발 굽내셨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의 몸에서 신비한 변화가 일어났다. 임신 반응 같았다.

할머니와 큰 엄마는 엄마를 데리고 노흑산에서 30여리 떨어져 있는 태평진의 용한 중의를 찾아가 맥을 보았다. 임신이 맞으며 아들맥이란다.

첫 번째 시집에서 임신 못해 쫓겨난 엄마는 그때 얼마나 기뻤는지 울기까지 하셨단다.

그해부터 엄마는 설날 아침에 먹은 떡국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으셨다.

이듬 해 6월에 엄마는 아들을 낳으셨는데 그 아들이 바로 나의 형님이었다.

그후부터 설날아침의 떡국은 엄마께서 주도해 만드셨다. 그런데 1944년 설날 아침 밥상에 하얀 떡국이 오르지 못했다.

떡국을 만들자면 쌀이 필수다. 노흑산은 심산골에 자리잡고 있어 벼농사를 짓지 못한다. 그래서 해마다 설 전에 기장쌀을 들고가 벼농사를 짓는 태평진의 조선인마을에 가 쌀을 바꿔 온다.

그런데 1943년 겨울에 일본놈들은 태평진의 조선인마을의 벼를 몽땅 털어갔고 대신 창고안에 있던 냄새가 심하게 나는 옥수수가루를 주었다. 그러니 1944년 설날아침에 하얀 떡국을 먹지 못했다.

그 후 마을은 무사하지 않았다. 그해 대보름이 지나기 전에 일본놈들은 한밤중에 트럭 4대를 몰고와 노흑산에 살고 있는 조선인 60호를 싣고 가 태평진에다 만들어 놓은 집성촌에다 부려 놓았다.

항일부대와의 연락을 끊으려고 마을 사면에 높은 토성이 있는 집성촌에 조선인들만 갇우었다.

비록 나드는 문이 두개 있으나 경비가 밤낮 지키고 있어 강아지도 나들지 못했다.

그것도 성차지 않아 그해의 7월 초 새벽에 트럭 4대를 끌고 와 노흑산의 60호 조선인들을 싣고 서북쪽으로 달렸다. 점심무렵에 트럭은 남북갈림길에 이르렀다. 앞에서 달리던 두대는 계속 남쪽으로 달렸고 뒤의 두대는 북쪽향 길로 돌려 달렸다.

몇시간 달려 자갈이 산처럼 쌓여 있는 자갈판이 나타나자 일본놈들은 30호 강제 조선인 이주민을 그곳에 부려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다.

자갈판은 7월의 뙤약볕으로 화마 같아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집 한채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 간단 말인가? 150여명 이주민들 앞에는 죽음의 길만 남아있다. 참으로 억이 막혔다.

그때에 동북쪽 길에서 웃통을 벗은 두남자가 서쪽으로 가다가 불볕 아래에 모여있는 이주민들을 보고 웬일인가고 물었다.

그 속에서 중국말을 할줄 아는 사람은 엄마 뿐이다.

엄마가 나서 사연을 말하자 그 중국인 두 사람은 일본놈들을 욕하면서 서쪽으로 가 버렸다.

한가닥 희망도 사라졌다. 죽음은 150여명을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때다. 길 서쪽에서 숱한 웃통을 벗은 남자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주민들은 겁기를 느꼈으나 잠시였다.

얼마전에 지나가던 한 사람이 다가와 엄마를 보고 말했다.

"난 앞 마을 신흥촌의 촌장입니다. 우린 당신들을 도우러 왔으니 겁 먹지 마십시오. 한 가족씩 우리 사람 한명을 따라 가십시오."

그리고 나서 엄마를 보고 식구들을 데리고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했다.

촌장께서는 네살인 나의 형님을 업고 앞에서 걸으면서 마을과 집 상황을 소개하셨다.

마을의 이름은 신흥촌이며 100호가 좀 넘는 마을이다. 자기는 성이 장가이므로 장촌장이라고 부르면 된단다. 집에는 부모님과 마누라 네식구 뿐이고 집도 넓어 부담갖지 말란다.

한 1리를 걸어가니 마을이 나타났다. 초가집들은 노흑산의 초가집보다 높고 컸다. 아버지한테는 생소했으나 중국인 마을에서 태여나 자란 엄마한테는 생소하지 않으셨다.

장촌장네 집에 이르자 문밖에서 세 분이 기다리고 계셨다. 소개하지 않아도 장촌장의 부모님과 부인임을 알 수 있었다. 모두 인자한 모습이었다. 장촌장의 부인은 달려와 엄마의 손을 잡고 고생 했다고 위로하셨다.

그때 엄마는 고마움에 울음을 터뜨렸다. 장촌장의 어머니는 웃으며 엄마의 옆에 서 있는 형님을 반기셨다.

그리고는 인차 몸을 돌려 손님들한테 더운물을 권하셨다. 중국인들은 여름에도 찬물을 마시지 않고 뜨거운 물을 마신다. 물 마신 후 찬물에 세수까지 하자 살 것 같았다.

저녁 음식은 중국마을에서 자란 엄마도 처음 보았다. 가마두껑만큼 크고 둥글뿐 만 아니라 종이장처럼 얇은 옥수수떡이다. 먹는 방법도 별스러웠다. 물로 약간 누기를 한 다음 종이장처럼 손바닥 넓이만큼 양 옆에서 안으로 접은 후 숟가락으로 된장을 한 숟가락 떠 그 중간에다 쭉 바른다. 다음 그 우에 대파 한대를 놓고 둘둘 만 다음 한쪽끝부터 씹어 먹는다. 고소하고 짭짤해 별맛이었다. 이 음식을 신흥사람들은 젠병이라고 불렀다. 조선인들의 밥처럼 젠병은 이 고장의 주식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나자 아버지, 엄마, 형님은 차려진 서쪽 거실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아버지께서는 눕자마자 잠에 골아 떨어졌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장촌장은 낫을 들고 밀 가을 하러 가려는 중이었다. 아버지도 대충 아침식사를 마친 후 낫을 들고 따라 나섰다.

노흑산의 중국인들이 아버지의 밀 가을 솜씨에 혀를 휘두르던 것처럼 그날 장촌장도 혀를 휘둘렀다. 동시에 좋은 일군을 얻었다면서 여간만 기뻐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버지를 동생이라고 불렀다. 두 가정의 우정은 이렇게 시작됐고 또 깊어져 갔다.

가을 타작까지 끝나자 이주민들의 마음은 허전해졌다. 계속 중국인 집에 얹혀서 살 수 없다. 마을의 제갈량이라고 불리는 큰 아버지께서 이주민들을 이끌고 마을 터를 잡고 마을 이름을 갱신이라고 지었으나 살아갈 집은 입과 빈주먹으로 지을 수 없다. 마을을 건설하려면 뭉치돈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무슨 방법으로 뭉치돈을 버나?

겨울이 닥쳐오자 이곳의 겨울은 말 그대로 엄동설한이었다. 신흥촌의 중국인들은 몸에는 털외투를 걸쳤고 발에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가죽털신을 신었다. 이렇게 차려 입어야 외출할 수 있단다.

이주민들은 돈이 없으니 이런 차림을 할 수 없어 겨울내내 집에 있어야 한다.

세월은 이주민들의 고통을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흘러 섣달을 맞이했다. 그러자 엄마의 근심이 나날이 깊어갔다.

새해 설날 아침에 떡국을 먹지 못하면 이주호들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생각만 해도 몸이 부르르 떨린다. 그런데 무슨 방법으로 쌀을 구해오나? 머리를 짜도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바로 그때다. 신흥촌의 동북쪽 15리 떨어진 곳에 조선인마을인 보흥촌이 있다. 일본놈들은 이 마을도 높은 토성을 쌓고 외부와의 연락을 감시하려고 집성마을로 만들었다. 이 마을의 최촌장은 이웃 신흥촌에 조선인 이주민 30호가 신흥촌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일본놈들의 삼엄한 감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여러날 고민끝에 일본놈감시가 심하지 않은 초저녁에 장정 4명에게 쌀 50키로를 나누어 지게 하고 신흥촌 이주민에게 갖다주도록 했다.

설날에 쌀밥을 먹게 하려고 모험을 했다. 쌀은 무사히 전달됐다.

쌀을 보자 제일 기뻐한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그 쌀을 각 호에 나눠주면서 설날 아침에 꼭 떡국을 해 먹으라고 지령을 내리셨다. 중국인집들에 돌 절구가 있어 쌀가루를 내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믐날 엄마는 떡국을 만들 가래떡을 만든 후 주인집에 있는 돼지다리 뼈를 고아 육수를 만들었다. 장촌장의 부인은 엄마를 보고 뭘 만드는가고 물었다.

엄마는 떡국을 만드는데 설날 아침에 이걸 먹으면 가정이 1년 무사하니 설날아침에 같이 먹자고 제안했다.

가정이 무사하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 장촌장의 부인은 그렇게 하자고 응낙하셨다.

그믐날 저녁, 느끼한 음식을 많이 드신 두집 식구들은 설날아침에 담백한 떡국을 한 사발씩 먹자 속이 개운했다.

장촌장은 이주민들이 걱정되여 대보름 이튿날에 이주민 골간인 큰 아버지, 갓 촌장으로 선거된 송석암 촌장, 부촌장 최사범을 자기집에 초대하고 술 대접을 하셨다.

술 몇잔을 마신 후 장촌장은 세 분을 보고 불쑥 금캐기 돈벌이를 하는게 어떻나고 물으셨다.

세 분은 모두 장촌장의 제안에 감사했지만 금캐기를 구경도 못하셨고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금캐기란 말을 들었기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자 장촌장께서는 그들이 지내온 일들을 들려주셨다.

이 마을의 촌민들은 모두 이곳의 원주민이 아니다. 10여년 전에 남방인 산동성에 큰 재황이 들어 고향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동북으로 떠나갔다. 그중 5호가 송강성 목릉현의 서쪽 골짜기에 자리를 잡았다.

토지가 비옥하고 가물과 홍수도 없어 살만했다. 처음에는 산밑에다 움집을 짓고 지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그런대로 살기가 괜찮은데 겨울은 산동성보다 엄청 추웠다.

산동에서 살던 초가 3간 집을 지으려면 엄청난 돈이 있어야 한다. 그때에 그들은 외지인들이 금함지박으로 강바닥 모래를 퍼담아 금을 일어내는걸 보고 따라 해 보았다. 놀기보다 낳았다.

금캐기를 한동안 하니 집 지을 돈을 마련하고 초가 3간을 지었다.

그후 이곳으로 찾아온 산동 사람들도 먼저 온 사람들의 도움으로 집을 먼저 짓고 정착했다.

여기까지 말한 장촌장은 세분에게 술을 권하면서 해볼 생각이 없는가고 물으셨다.

그때 옆에서 통역하시던 엄마가 세분을 보고 말하셨다.

"설날 아침에 먹은 떡국이 신비한 힘을 줄 수 있으니 한번 해 보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엄마의 말에 아버지께서 먼저 수긍하셨다.

며칠 후 장촌장은 30명 이주민 남성일군들에게 빌려온 가죽옷과 가죽신 차림을 하도록 했다.그리고는 마을터를 잡은 강건너 마을터 서쪽 골짜기에 금점굴 5개를 내면서 금캐기 작전을 시작했다.

15일만에 금층을 찾은 일군들의 두눈이 휘둥그레 졌다. 금층 모래에 싯누런 싸락금이 눈에 보일 정도로 많았다.

노다지를 만났다.땅이 녹기전까지 캔 금으로 마을의 30채 집을 짓고 또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데 드는 돈이 넉넉했다.

엄마는 이 뭉치돈이 떡국의 신비한 힘으로 벌었다고 믿었다.

여러 사람들도 그렇다고 수긍했다. 떡국의 신비한 힘의 발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해 봄에 엄마의 몸에서 그 힘이 일어났다. 형님을 낳은후 5년만에 엄마는 임신반응을 느꼈다.

이보다 더 큰 변화가 시집온지 6년이 되도록 출산을 하지 못한 장촌장 부인의 몸에서도 일어났다.

장촌장은 즉시 마차에 두 여인을 태우고 마을에서 20여리 떨어져 있는 현성의 용한 중의를 찾아갔다. 진맥하니 두분 다 임신이 맞고 또 아들맥이란다.

장촌장의 부인은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엄마의 덕분이라며 기뻐 어쩔바를 몰라했다.

이 소식은 신흥촌을 들끓게 했다.

그 이듬해에 갓 일어선 갱신마을에서 첫 고고성을 울린 애가 바로 최사범의 둘째아들 최영철, 바로 나였다.

보름후 신흥마을에서도 광복후 첫 고고성이 울렸는데 걔가 바로 장촌장의 아들 장규다.

그 후부터 그믐날 저녁이면 두집 식구들은 장촌장네 집에서 설을 맞았고 설날 아침에는 두집 식구가 우리 집에서 떡국을 먹으면서 설날을 보냈다.

1945년 떡국의 신비한 힘의 발휘는 우리 집에서 멈추지 않았다.

1946년 봄에 내가 태여난 후 30호 마을에서 어린애 6명이 더 태여났다. 모두 맏아들로 태여났다.

마을의 할아버지들께서는 감탄을 멈추지 않으셨다.

그후 해마다 설이 오면 설날 아침에 온마을 촌민들이 열심이 떡국을 먹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1959년 설전에 새로운 난관으로 엄마는 속을 썩이셨다.

1958년초부터 중국 대지에 대약진, 인민공사 바람이 휘몰아쳤다. 촌의 상급 정부인 향정부는 인민공사로 대체됐다. 마을 이름은 갱신촌이 아니라 갱신대대로, 촌장은 대대장으로 군대 직급이 달렸다.

마을이 대대로 변하자 이름만 변한것이 아니라 전마을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촌민 250여명은 하루 세끼 밥을 집에서 먹지않고 마을의 공동식당에서 먹었다.

당시 식당 취사원인 엄마는 다른 2명 취사원과 함께 밥짓기로 바쁜 하루를 보내셨다. 그렇게 지내다가 섣달을 맞은 엄마는 설날아침의 떡국 먹는 일로 남 모르게 속을 썩이셨다. 취사원 3명이 250여명이 먹을 수 있는 떡국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앞마을 신흥촌에서는 설기간엔 식당문을 닫고 집에서 밥 먹게 했다.

그런데 갱신마을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무엇 때문인가? 집집의 부엌에 놓여있던 조선가마솥이 사라졌다.

이 솥들은 어디로 갔나?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웃음과 한숨이 나올 일이다.

1958년 봄에 중국은 영국의 강철생산량을 릉가한다면서 마을마다 용광로를 만들고 강철을 생산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갱신대대서도 용광로를 짓고 강철생산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마을 부근에 있는 철광석을 캐서 철을 제련했다. 반년도 지나지 않아 철광굴이 바닥났다.

그러자 대대간부들은 남녀노소를 총동원해 마을과 부근에서 페철을 줍게 했다. 그것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멈췄다.

현정부에서 내려준 임무를 완수하려고 대대간부들은 집집의 부엌에 걸려있는 가마들을 들고가 용광로에 처 넣었다. 참 어처구니 없는 짓이었다.

상황은 이처럼 어려웠으나 엄마는 뒤로 물러서지 않으셨다. 엄마는 부녀주임을 찾아가 전마을여성들을 조직해 떡가루를 낼 방안을 제출하셨다. 부녀주임은 동의했고 적극 나섰다.

그믐날 오후 50여키로 떡가루가 식당에 도착했다. 엄마는 그 가루를 즉시 시루로 쪘다. 다음 여성 50여명은 식당의 밥상우에서 가래떡을 만들고 또 동그랗게 얇게 썰었다.

육수를 만드는 것은 별문제 없었다. 해마다 설 전에 마을에서는 포수(사냥군) 5명을 산골에 보내 설 거리를 잡아오게 했다. 그때 포수들은 노루 3마리, 멧돼지 2마리, 꿩 10여마리를 잡아왔다.

그러니 육수, 고명, 술 안주는 제대로 만들 수 있었다.

1959년 설날 아침이 제때에 찾아왔다. 250여명 촌민들이 식당에 모였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신흥촌에 가셔 장촌장네 식구와 갱신마을 건설에 힘바친 분 10여명을 모시고 식당에 도착하셨다.

신흥촌의 손님들은 빈손으로 오시지 않았다. 자체로 고은 술 두단지와 폭죽 5다발을 갖고 왔다.

떡국을 먹기전에 폭죽 5다발을 동시에 터쳤다. 하늘을 진감하게 폭죽소리는 요란했다.

축배속에서 하얀 떡국은 설을 맞는 사람들의 입을 거쳐 위로 들어갔다. 갱신마을이 세워진 후 제일 성대한 설맞이었다.

당시 그릇된 정책으로 1960년 설맞이는 더 큰 난관을 만났다.

1959년 탈곡이 끝나기 바쁘게 현정부에서는 트럭 여러대를 몰고와 촌민들의 식량으로 할 벼를 몽땅 실어갔다.

대신 현 창고에 몇해씩 묵혀있던 옥수수가루를 실어왔다. 그런데 실어간 벼 수량보다 20% 적었다.

그러니 떡국을 만드는데 드는 쌀이 없다. 이웃엔 조선족마을이 3개 있으나 형편은 마찬가지여서 쌀을 바꾸어 올 곳도 없다.

엄마는 식량창고 안을 돌아 보았다. 쌀 24키로, 밀가루 24키로가 눈에 안겨들었다. 그것은 촌민의 식량이 아니다. 그때 마을에서 현중학교에 다니는 학생 나를 포함하여 12명이 있었는데 그들이 겨울방학에 집으로 올때 학교식당에서 배급받아 온 식량에 1인당 쌀 2키로, 밀가루 2키로 따라 온 것이다.

이걸 본 엄마는 여러날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나서 다른 취사원들과 함께 그 쌀과 밀가루로 떡국을 만들 방법을 찾았다.

나중에 선택한 방법은 밀가루 24키로도 떡국을 만들며 부족되는 것은 감자를 썰어 넣기로 했다.

그믐날 마을 여성들이 팔을 걷고 새로운 떡국을 만드는데 뛰어들었다. 쌀떡, 밀떡이 만들어졌다.

설날 아침 육수에 제일 먼저 떡국 모양으로 얇게 썬 감자를 넣고 끓였다. 감자가 좀 익자 밀떡을 넣었다. 나중에 쌀떡을 넣었다. 다 끓은 다음 맛을 보니 먹을만 했다.

그날 설날 아침에 아버지께서는 새로운 떡국에 파악이 없어 장촌장네 식구 5명만 모셔왔다.

중학생인 장규는 먹어보더니 "우라!"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 우리 조선족 중학생 12명도 함께 "우라!" 하고 외쳤다. 우라란 구호는 러시아 구호인데 만세란 뜻이다. 그때 중학교에선 로어를 외국어로 배웠었다.

또 한해가 지나 1961년 겨울이 찾아왔다. 마을의 탈곡이 끝났다. 탈곡장에는 이튿날 현에서 실어갈 벼마대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당시 갱신대대의 대대장인 아버지께서는 깊은 생각에 잠기셨다.

저 벼무지를 현에서 실어가면 촌민들은 여전히 굳어 씹기 힘든 옥수수떡과 싱갱이질 해야 한다. 영양부족으로 임신부 한명이 류산했다. 젖먹는 어린애들이 엄마 젖이 적어 배고프다고 여기저기서 울어댔다. 60이 넘은 노인들의 기침소리도 들려와 아버지의 가슴속을 마구 허볐다.

아버지께서는 용단을 내리셨다. 집에 있는 나더러 생산대의 대장 2명과 창고보관원을 당장 집으로 데려 오라고 하셨다.

그분들이 도착하자 아버지께서는 생각밖의 명령을 내리셨다.

"지금 당장 벼 마대를 사원들 가정에 나눠 주오. 내일 내가 인민공사의 사장을 찾아가 뒷마을에서 훔쳐갔다고 신고하겠소.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으니 신속히 움직이오."

그런후 군대에서 정찰병을 한적 있는 창고보관원더러 현장처리를 잘 하라고 당부하셨다.

이튿날 아버지의 신고를 접수한 인민공사의 사장은 현정부에 신고한 후 현공안국의 경찰 6명을 데리고 마을에 와 깐깐히 현지 조사를 했다.

마을에서 6리 떨어져 있는 한족마을에서 2년전에 마을뒷산에 있는 조밭의 조를 훔쳐간 전례가 있다. 이번 사건으로 현경찰들이 그 마을을 찾아가자 모두 산동에 있는 고향으로 설 쇠러 가 마을은 텅텅 비어 있었다.

연며칠 조사한 후 현 경찰에서 벼무지도난사건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현 정부에서는 벼를 가져가지 못하고도 식량인 옥수수가루를 실어다 주었다.

이 사건후 아버지께서는 식당문도 닫아버렸다. 1년 전에 마을 정부에서 조선가마솥을 사서 전 마을의 부엌에 올려놓았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1964년 가을에 마을의 한 사람이 아버지한테 반감이 있어 벼무지 도난사건은 아버지가 조작했다고 인민공사정부를 찾아가 고발했다.

그러나 그때는 중국정부도 당시의 정책에 착오가 있다고 했기에 아버지께서는 감옥생활을 면하고 대대장직에서 떨어졌다.

아버지께서는 개척하신 고향마을에서 살 멋이 없어 1965년 봄에 보흥마을로 이사했다.

그후 문화대혁명이 일어났고 또 아버지께서 역사반혁명분자로 몰려 투쟁을 받던 세월에도 엄마는 설날에 떡국을 만드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그믐날 오후 엄마는 날 시켜 장규네 집에 떡국과 육수를 가져가게 하셨다.

그래서인지 장규는 1965년 9월 북경철로대학에 입학해 신흥마을의 첫 대학생이 됐다. 나도 1978년 3월에 연변대학에 입학해 갱신마을의 첫 대학생이 됐다.

대학졸업후 장규는 북경 철로 연구원에 출근했고 난 흑룡강신문사에 출근했다.

할빈으로 이사간 후에도 나는 엄마의 생전에 매년 설마다 식구들을 데리고 엄마의 집에 가 설날 아침마다 하얀 떡국을 먹었다.

엄마께서 세상을 뜨신 후 할빈 조선족상점에서 가래떡을 살 수 있어 설날 아침마다 떡국을 먹는 것을 잊지 않았다.

2013년 6월 한국에 오자 떡국 먹기가 쉬워졌다. 그런데 엄마의 떡국과 달리 머리 속에 깊이 박히지 못했다.

그래도 난 하얀 떡국을 설날 아침마다 열심히 먹고 또 먹고 있다. 그래야 엄마한테 가면 떳떳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 떡국으로 우릴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 이제부터 스무번 더 하얀 떡국을 먹은 후 엄마 뵈러 갈게요.

/둘째 아들 : 최영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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