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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은정 찾아 구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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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2-07-03 07:10 조회313회 댓글0건

본문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인연을 만나고 헤어집니다. 사정에 따라 오랫동안 못 만나면 잊혀 지기도 하고 그리워하기도 하면서. 저도 예외 없이 많은 인연들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살아왔는데 그 인연 중 영원히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될 한분이 있어 이 글에 올려봅니다.

 

2007년도에 꼭 만나고 싶은 그 인연을 찾아 이십 년 만에 다시 밟은 한국 땅, 고향에서 수소문하였지만 끝내 찾을 수 없어서 실망만 안고 살다가 큰 희망을 품고 다시 서울에 와서 한걸음에 함께했던 옛 곳으로 뛰어가 봤지만 나무아미타불, 이십년 세월이 그대로 멈출 리는 없었습니다. 옛터는 찾아볼 수 없고 고층건물들이 숲을 이루어 어디에 물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아 맥 풀린 다리를 끌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서울 땅에서 또 십여 년이 애만 태우며 오늘까지 아무런 실마리도 없이 흘러갑니다.

 

‘정영숙 언니를 찾습니다. 87년도 서울강북구 미아동 (집창촌 부근) 주원장모텔에서 함께 일하면서 많은 도움 받은 청몽루(청몽루, 작가님이 지어준 이름. 그때 한국에선 몽루야 하고 불렀음. 당시 스물한 살)가 안도에서 오셨다는 언니 정영숙씨를 오랫동안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보통 키에 서른한 둘 정도에 남편은 채씨, 고향에 열 살 미만의 딸 둘, 그 당시 남동생도 한국에 있은 것으로 기억됨’ 이건 삼십 여년이 흐르도록 내내 찾고 있지만 오늘까지도 종무소식인 영숙언니를 찾는 광고문입니다.

 

아마 제가 알고 있는 모든 분들은 누구나 한번이상은 이 메시지를 받아보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매스컴시대라 혹여 옛날에 비해 발이 더 넓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에 다시 올려봅니다.

 

삼십여 년 전, 백두산아래 기막힌 시골의 소학교, 학생이라야 겨우 오십 명 되나마나한 학교에서 열두 명 아이들을 가르치는 햇내기 교원이었던 저는 시내에 사는 가족들과 떨어져 기숙생활을 하는데 우연한 기회에 백두산유람 중으로 시골마을에 며칠 머무르는 한국의 작가를 만나게 됩니다. 그 분의 초청으로 한국이라는 데가 뭔지도 모르면서 겁 없이 서울에 날아왔습니다. 처녀애들 외국가면 다 팔아먹는다고 난리난리하는 할머님과 부모님한테는 북경에 몇 달간 연수 간다고 거짓말하고 큰언니하고만 딱 석 달만 구경하고 돌아온다고 약속하고 떠난 걸음 이였습니다.

 

작가님의 안내로 여기저기 구경도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도하면서 한 달을 흘러 보내고 나니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습니다. 만류하는 작가님을 설득해서 찾은 일자리가 바로 (주원장)모텔인데 그곳에서 정영숙 언니와 함께 일년 여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직 체력로동이 뭔지도 모르던 저에게 모텔청소란 생소한 환경의 적응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포기하려고 맘먹는데 죽으라는 법은 없나봅니다. 지금과 달리 출국하는 사람이 극히 적은 80년대 후기 올림픽전해라 그것도 우리연변언니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제일처음 기억되는일은 집에서 출국당시에 입었던 양장스커트차림에 청바지 둬 벌, 그기에 작가님이 사준 원피스가 저의 전부의 재산이었는데 칠월의 혹 더위에 그 차림으로 어떻게 일을 하냐면서 저를 끌고 부근의 시장에 나가더니 몸빼바지와 앞코가 막힌 파란색 고무끌신을 사주셨습니다. 엄마들이 집에서 밥할 때나 입는 몸빼바지를 보면서 뒷걸음치는 저에게 억지로 입혀줬습니다.

 

그렇게 입기 시작한 몸뻬바지가 그때부터 제가 제일로 즐겨 입는 옷이 될줄이야 .아직 학생티를 못 벗은 애송이였건만 그 후로는 내내 입고 다녔습니다. 귀국길인 김포공항에서 홍콩으로, 홍콩에서 다시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내 그 차림이었고, 그 후에 남방 땅에서 십 수 년 살면서도, 그리고 여러 여행길에서도 몸뻬바지는 나에게 제일중요한 나들이옷이 되었습니다. 이십대 초의 아가씨로부터 육십을 눈앞에 둔 아줌마, 아니 할머니가 된 요즘도 집 부근의 독산동현대시장에서 오천원주고 산 꽃뿌리 몸뻬바지로 멋을 내고 서울장안을 휩쓸고 다닌답니다. 촌스럽다 못해 팔순의 엄마보다도 더 늙어 보인다는 남동생의 타발도 수십년 흐르도록 멈출 줄 모르고, 누이나 동생이나 고집은 똑같이 오늘까지도 못 꺾네요. 왜 그렇게도 집착 하냐구요? 얇고도 편하디편한 몸뻬바지, 칠월의 불더위에 두껍고 불편한 청바지차림으로 손님들이 쓰고 간 뜨거운 김이 서려 숨이 컥컥 막히는 모텔화장실에서 헤매다가 팔랑팔랑거리는 몸뻬바지가 얼마나 필요한지 말로는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입어보니 생각과는 달리 나 혼자만 느끼는 남다른 멋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비자연장으로 작가님 차에 타고 영사관대사관 드나들 때도 그 차림 이였는데 작가님 지인분들을 우연히 만났을 때는 눈치도 좀 보였지만 보는 사람들이야 어떻게 불편하든 더는 상관 않기로 하고 살아온 저의 몸뻬바지의 삶 ,지금은 일년 사계절 여느 때 없이 입을 수 있게 저한테는 십여 벌의 몸뻬바지가 구전히 있답니다. 봄가을엔 재료가 좋은 걸로, 여름엔 짧고 얕은 색으로, 겨울엔 두꺼우면서도 진하고 예쁜 색으로.

 

그 당시엔 일이 힘들고 경험도 없고 솜씨도 없는 저는 성격도 천방지축이라 맨날 쫓겨 날 위기였지만 영숙언니가 제 앞을 막아주고 때론 제 불찰을 자기가 뒤집어쓰기도 하면서 떠날 때까지 무사히 있게 해 주셨습니다. 밤늦어 일끝나면 숙소에서 맥주한잔 마시면서 저는 너무 힘들어서 울고 언니는 두고 온 집식구들이 그리워서 울고, 그렇게 울다가는 서로 부둥켜않은 채로 잠들기도 했습니다.

 

언니는 항상 챙겨주기에 바빴고 너무 힘들어 포기하려고 할 때면 집에 돌아가면 지금 받고 있는 하루일당이 고향에서의 몇 십 배냐고 하면서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이겨나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일일이 떠나는 짐까지 다 싸주고 또 위험을 무릅쓰고 급여로 받은 돈은 싸게 달라로 바꿔서 속옷을 바느질하여 몸에 잘 지니게 하였습니다. 그 덕에 무사히 집에 와 환전해서 따져보니 적어도 사십 퍼센트는 득을 봤었습니다. (그때 북한 밀수차를 변경을 통해 연길에 들여오기 시작하는 때라 암시장에서 딸라 값이 하늘로 치솟았음),

 

그때 연길주변 집값이 한국에서의 두 달 월급이 되나마나했는데 그렇게 번 돈으로 개발공사에 출근하셨던 형부의 알선으로 큰언니는 백 평 넘는 널찍한 마당을 가진 단층집 네 채를 구매했고 몇 년 후엔 아파트 몇 채로 변신하기도 했는데 90년대 초, 정말로 어마어마한 재산 이였습니다. 그리고 스무살되나마나한 남동생한테 승용차 사주고(이건 내 인생에서 큰 불찰, 한족아바이를 다쳐놓아서 아파트 한 채 값을 다 날려먹음, 그러고도 몇 년 동안 온집식구들 시달려서 죽게 힘들었음). 그 덕으로 지금껏 편한 생활을 이어오는데 이건 모두 영숙언니의 진심어린 방조가 없었으면 어림도 없는 일, 한 입으로 다 말할 수 없는 가지가지 일들은 내 평생 마음의 재산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려웠던 그 세월에 정말로 귀중한 조언들을 해주셔서 끝까지 견딜 수가 있었고 주옥같은 그 조언들이 후 날 살아가면서 힘들 때마다 큰 용기로 되고 신심이 되여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쉽게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어디가든 주눅 드는 법 없이 빈주먹으로도 너무나 당당해서 탈입니다.

 

오늘도 안타까움을 달래보려고 또 몸뻬차림으로 거리에 나섰는데 세어보니 꼬박 삼십 오년 흘렀는데 여러모로 수소문했지만 ㅡ만 서른다섯 해의 칠월이 다가오고 있는 오늘까지도 한강에 진짜 돌을 뿌립니다. 아하하ㅡㅡ 한숨을 뼈아프게 내뱉는 저의 가슴 깊은 곳엔 줄 끊어진 희망이 가라앉음은 또 무엇인지. 그때 벌써 간 쪽에 문제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당뇨가 있다고 하셨는데 혹시 지금나이로 육십대 중후반이라 그래서 제가 지금도 못 찾고 있는 것은 아닐지?

 

‘영숙언니, 살아있으면 제발 내 앞에 나타나주라. 그때 철없어서 받기만 했던 것들 나도 더 많이 되돌려주고 싶고 못 다한 이야기들 날 새도록 주고받으며 인제야 잘 어울리는 몸뻬차림도 자랑하고 싶어. 그렇게도 좋아한다던 고추순대를 일부러 만드는 법 배워뒀는데 이 솜씨 언제면 손 펴 볼라나’

 

이건 내가 맥주한잔한 날이면 창가에서 혼자 쿨쩍 거리며 몇 년 째 중얼거리는 염불입니다. 주위에 계시는 분들께 한마디만이라도 전하고 또 전하고 그러면 혹시 만날 순 없어도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하게나마 기대를 품습니다.

 

유난히도 더웠던 그해의 칠월을 못 잊어서 오늘도 언니 찾아 헤맵니다.

/한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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