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이른 아침부터 아버지는 호미 두 자루를 손에 들고 어머니는 밥찬을 싼 보자기를 머리에 이고 좁다란 산길을 헤치면서 산장 밭 콩 ,조 ,옥수수 등 김을 매러 가면 나도 쫒아갔다.
한여름 산밭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지열, 그리고 하늘에서 내리쬐는 강열한 자외선과 열기를 참아가며 아버지는 허리를 구부리고 어머니는 쪼그린 채 호미질을 부지런히 하였다. 나는 그늘진 나무 밑에 앉아 맨땅에다 그림 그리고 글을 쓰고 흙집을 만들면서 놀았다. 그러다 정오가 되면 아버지 어머님과 함께 샘물가에 앉아 점심밥을 먹었다.
“둘째야, 공부를 잘하여 앞으로 시골을 떠나거라.”
‘예, 엄마“
한족중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불호령에 생산노동에 나서게 되었다.
아침부터 아낙네들 뒤꽁무니 쫒아 농사일 중에서도 가장 힘이 든 논김을 매었다. 7월의 불볕이 익을 대로 익어 논배미의 물에 거품이 보글보글 일게 만들고 갓난아기의 입김에도 흔들릴 정도인 벼 잎사귀도 까딱하지 않을 정도로 바람도 불지 않았다.
일군들은 가로 한 줄로 서서 서너 줄씩 맡아가지고 벼 포기사이의 김을 뜯어내고 흙을 긁어주었다. 나는 벼 포기에서 돌피를 골라내는 것이 그렇게도 힘들었지만 아낙네들은 해빛에 돌피의 잎이 유난히 노란빛을 띤다는 것, 돌피 잎 가운데 줄기가 흰색을 띠고 윤기가 난다는 것 등의 특징을 잘 아는지라 눈짐작으로 제꺽제꺽 가려내어 돌피포기를 뿌리 채 뽑아버렸다.
점심때면 가족끼리 논밭머리 맨땅에 비닐 펴고 밥찬을 놓고 진수성찬보다 맛나게 먹었다.
그러다 지긋지긋한 시골을 벗어나 국록을 타먹는 장미 빛 인생을 살다가 10년 전 한국에 입국하여 교원으로부터 홀서빙으로 신분이 바뀌었고 줄곧 야당리 외식공간에서 하루에 12시간 일하면서 집과 식당만 다람쥐 채바퀴 돌 듯 오갔다.
코로나로 식당이 폐업되면서 퇴사하고 요즘 새벽밥을 먹고 공사장 현장 일에 나섰다. 현장에서 나는 목수, 철근, 방수, 토목... 등 이주노동자들이 힘겹게 일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불볕에 땅은 열기를 되 뿜어내고 금방이라도 숨이 막힐 것 같은 푹푹 쪄대는 더위 속에 등은 푹 젖었고 무더위와 일에 몸은 지치고, 얼굴과 손목의 살갗이 자외선에 검게 그을렸다. 점심때면 옹기종기 보도볼 줄에 앉아 허해진 원기를 찾을 수 있는 닭백숙도 아닌 배달밥으로 주린 배를 채운다,
60년 세월, 강산만 변한 것이 아니다. 사는 것도 변하고 사는 것에 대한 가치관도 변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변한 것이 없었다.
그렇다. 세월이 흘러도 자기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무거운 짐은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신석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