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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있을 때 잘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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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재외동포재단 작성일22-06-30 17:22 조회341회 댓글0건

본문

세월이 화살이 같다더니 나도 어느새 60세를 넘긴 노년기에 들어섰다. 사회가 좋으니 나도 각종 운동에 참가하면서 신체 단련을 할 때가 많다. 신체단련 하고나면 몸도 마음도 거뿐해지며 유쾌하다.

 

어렸을 때, 어떻게 되는 친척인지도 모르고 어머님의 “면목”으로 스케이트를 얻어 가져 그 스케이트 덕에 어려서부터 스케이트를 익혀 그 덕에 체육세포가 남보다 많이 못한 내가 노년기에도 남들처럼 스케이트를 탄다. 그러다보니 그제 날 나에게 스케이트를 준 고마운 ’친척집’ 분들이 더없이 그리워나며 그 은혜에 보답 못하여 안타깝기만 하다.

 

약 50여 년 전 겨울, 내 나이 약12-13살일 때였다. 우리 큰형님이 대학을 졸업하여 월급쟁이 되니 그놈의 가난으로 오랜 세월 만나보지 못한, 지금은 멀지 않지만 당시는 멀고도 먼 룡정에 있는 어머님 남동생, 우리 외삼촌을 만나보게 어머니에게 차비와 용돈을 대주었다.

 

어쩌다 떠나는 먼 길, 어머님과 큰형님의 대화에서 룡정으로 가려면 우리 마을에서 버스타고 왕청에 간 후 왕청에서 기차타고 도문에서 하룻밤 묵고 이튿날 다시 기차 타고 가서 조양천에서 또 기차를 갈아타고 간다는 큰형님 말에 나는 귀가 솔깃하여났다. 기차란 멀리에서만 보았던 나는 기차를 몇 번 씩 갈아타고 또 도문이란 시가지 집에서 하룻밤 잔다니 나도 가고야말겠다고 속다짐하였다.

 

먼저 번에도 둘째형님이 팔에 홍위병 완장을 끼고 모주석의 접견을 받으러 북경으로 갈 때, 나는 기차를 실컷 타보자고 따라나서서 마을 끝 큰 다리까지 갔지만 홍위병 완장을 낀 둘째형님 친구들이 쫓으며 뿌리는 돌 총에 방법 없어 못 갔는데 이번엔 돌 총질하는 사람이 없으니 꼭 가기로 마음먹었다

 

“엄마 나도 같이 가겠소.”

 

나는 어머님과 청들었다

 

“너 어디라고 그러냐? 안된다.”

 

자애로운 어머님이지만 딱 잘랐다 하지만 나는 내가 여러 번 청들면 자애로운 어머님이 허락할 것 같아 여러 번 떼를 쓰며 가겠다하였다. 하지만 어머님은

 

“후_ 글쎄 너 그 주제 해가지고 어디로 가겠다고 이러냐? 안 된다.”며 계속 자르셨다

 

그제 날 애들이 많은 우리 집은 윗사람이 작아 못 입는 옷을 아랫사람이 넘겨받아 입어왔다 나도 나의 금방 위형님이 작아 못 입는 깁고 또 기운 옷을 입었고 그 맵시로 어쩌다 가는 형제 집으로 아무리 자애로운 어머님도 어찌 허락하랴!

 

떠나는 날 어머님 일행이 버스에 오를 때 나도 가겠다고 버스에 오르려 하였지만, 무서운 큰형님에게 쫓겨 버스에 못 올랐다.

 

언젠가 우리또래 누구는 연길까지 갔다 왔다며 기차 안에 군대 등 벼라 별 사람들이 다 있고, 이 칸에서 저 칸으로 마음대로 다닐 수 있으며 기차굴(터널)을 지날 때면 기차 안은 전등을 켜놓아 대낮처럼 환하고 창문 아래에 붙여놓은 담배재떨이는 가지고 놀기 좋더라는 등 소리에 우리 또래들은 그 애를 부러워하였고 나는 긴 로정기차를 타보는 것이 하나의 소원이 되었다.

마침 기회가 왔는데 놓치면 다시는 기차를 타 볼 것 같지 못하여 어머님이랑 앉은 버스가 떠난 후 나는 안절부절못하다가 기차 시간되기 전에 왕청 역전으로 빨리 갈수 있는 산길로 달려갔다.

 

역전까지 가니 다행히 그 번 기차가 오기전이였다. 역전 대합실에 들어서니 추운겨울이지만 대합실은 사람들로 북적이었고 나의 머리에서는 땀이 마구 떨어졌다. 나는 솜 옷 단추를 헤치고 어머님과 형님이 어디에 있을까, 그러면서도 형님에게 발각되면 또 쫒길까봐 숨죽이고 도적고양이처럼 역전 안을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님과 큰형님 그리고 애기를 업은 큰아주머니 등 여러 사람들이 한곳에서 한담하는 것이었다 한쪽에 숨어 그들을 살피며 큰형님의 눈길이 다른 데로 돌릴 때 나는 어머님 곁에 다가서며 ”엄마”하고 불렀다. 나를 보던 어머님은 몹시 놀란 기색으로

 

“아니 네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 이 머리에 땀을 봐라”라며 두 손으로 나의 땀을 닦아주었다. 큰형님도 놀란 기색으로

 

“안 된다 이제라도 왕청 아재네 집에 가 오늘밤을 자고 내일 집으로 가라”고 하였다. 서산으로 기우는 겨울의 짧은 해에 20여리 길을 나더러 되돌아가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이 땀을 흘리며 온 걸 어찌겠소. 아재네 집에 가도 그들이 놀라하겠는데 데리고 가기오.”하며 어머님이 큰형에게 청들었다. 어머님 덕에 나는 그 번 행렬에 가입하여 기차에 오르게 되였다.

 

도문에 도착하니 날씨는 이미 어두웠다. 우리 일행은 먼저 백화 상점에 들어갔다. 큰아주머니는 웃옷을 사 내가 입은 누더기 솜옷위에 껴입히고는 이어 이발관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큰아주머니를 따라 도문 시가지에 있는 큰아주머니 친척 집 즉 사돈집에 가 저녁 먹고 그날 밤을 잤다.

 

이렇게 나는 난생처음 추운날씨에도 사람들이 오가는, 전등을 켜놓은 시가지 밤길에서 걸어 보았고 바깥은 어두우나 전등을 환하게 켜놓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큰 상점(백화상점)을 보았으며 전등 켠 집안(리발관)에서 한족 말 모르는 나에게 웃으며 손짓으로(머리 씻고 다시 걸상에 앉는 등)알려주는 한족여인에게서 머리를 깎아보았다.

 

한마디로 어두우면 집안에서만 전등을 켜거나 그것도 쩍하면 정전(停电)되여 등잔불을 많이 보아오던 나는 어두워도 전등을 켜놓고 대낮같이 환한데서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가지를 구경하였다.

 

이튿날, 큰형님이 나와 어머님을 조양천까지 데려다주었다. 나와 어머님은 조양천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룡정으로 향하였다. 차칸에서 어머님은 옆 사람들과 이야기도 곧잘 나누었다. 어디에 있는가? 그곳에서는 양식이 흔한가? 양식고생은 안하는가? 한공(每工 집체농사 때 노동량)에 얼마 가는가 하는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에 룡정에 있는 남동생의 집으로 가는데 집이 어디에 있는 줄 모르고 그저 어느 학교에서 교장하는 것만 안다하니 옆에서 중학생 쯤 되는 여학생이 자기도 룡정으로 가는 길이며 그 교장 집을 안다고 하였다. 그는 우리와 함께 기차에서 내리더니 외삼촌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렇게 우리는 그 마음 좋은 누나 벌되는 여학생의 안내에 추운고생 적게 하며 쉽게 외삼촌네 집에 들어섰다.

 

이렇게 나는 난생처음 제집마당이 따로 없고 문들이 줄지어지고 문만 나서면 아래윗집 사람들과 마주치는 시가지 집에서 며칠 있어보았다.

 

며칠 후, 어머님이 룡정에 있는 여러 친척집을 다닐 때 나도 따라 다녔다. 가는 집마다 서로 어쩌다 만났다고 어른들은 이야기를 끝없이 나누었다. 어느 한집으로 갈 때는 기차 길 지났으니 역전에서 멀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 집에서는 두부 방이 곁에 있다며 점심에 ‘드리장’을 끓였는데 배를 굶던 시기여서인지 나는 ‘드리장’이 모자라는 줄도 모르며 많이 맛있게 먹었다. 그 집에서도 어머님과 그 집 어른들은 오랜만에 만나여서인지 이야기가 끝없었다.

 

어른들이 이야기를 나눌 때 바깥에 나가 놀던 나는 문이 열린 그 집 ‘허덕 칸’(창고)에 스케이트가 벽에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 스케이트가 어찌나 욕심나던지 나는 집에 들어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어머님과 스케이트를 가지겠다고 하였다.

 

“아무 물건이나 가지냐? 안된다.”며 어머님은 잘라 땠다. 이에 나는 울상하며 계속 가지겠다고 칭얼댔다. 어머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분은

 

”그게 너 ‘바윗돌’ 형님의 것인데 나도 마음대로 못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스케이트를 가지고야 말겠다고 생각한 나는 어머님을 붙잡고 계속 칭얼거렸다. 두 분은 계속 대화할 수 없었다.

 

“그럼 어찌겠나? 가져가거라.”

 

그분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나는 그 집 창고에 가 스케이트를 벗어 스케이트 끈을 나의 목에 걸었다.

 

이렇게 나에게 스케이트가 생겼고 나는 그 스케이트를 돌아오는 기차에서도 또 마을에 와서도 자랑삼아 항상 앞가슴에 걸고 다녔다.

 

이렇게 스케이트가 있었기에 나도 어려서부터 스케이트를 탈줄 알게 되였고 60넘은 지금도 넘어지면 머리가 박살 날 듯 한 얼음강판에서 남들처럼 스케이트를 나는 듯이 타기도 한다.

 

매번 스케이트를 탈 때면 당년의 일들이 떠오르며 이제라도 그 주기 힘든 아들의 물건을 우리 어머님 ‘면목’으로 나에게 준 그분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솟아오른다. 하지만 대체 우리와 어떻게 되는 친척인지도 모르고 지나왔으니 어디에 가서 감사를 드린다는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분도 인젠 연세가 적지 않아 어쩌면 저 세상 갔을 것이고 그’바윗돌’ 형님도 인젠 노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후손들은 꼭 있을 것이니 물질이 풍부한 지금 형님 벌 되는 사람 혹은 그 후손들이라도 찾아 그때의 ”옛말”하면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어떻게 되는 친척인지도 모르고 있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 집은 가능하게 우리할머니의 가문일 것 같아 나와 연계가 있던 우리할머니 가문의 애에게 전화를 했다. 그 애는 내말을 마저 듣지도 않으며 시끄럽다 듯이

 

“인젠 모두 죽고 없는 사람들을 왜 자꾸 외우오?”하며 전화를 끊어버린다.

 

어머님 생전에 알아 볼 것을 못 알았으니 통신과 교통이 발달한 지금에도 가까운 룡정에 있는 친척을 찾을 길 없다. 만약 어머님 생전에 어떻게 되는 친척인 걸 알아봤더라면 이렇게 방향 없는 추측과 전화를 하지 않고 쉽게 찾을 수 있었을 것을. 결국 나는 어머님과 그분에게 영원히 갚기 어려운 마음의 빚을 지고 말았다.

 

인간관계중 하나인 친척관계에는 물질 상 등가관계 외에 시장경제 물결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알기 힘든 그 무엇이 있다고 나는 생각된다. 그제 날 모두들 식량 고생할 때, 누구네나 손님이 오는 걸 꺼렸다. 하지만 가난으로 ‘두더지’같은 나를 데리고 다니는 어머님에게 여러 친척들은 얼굴하나 흐리지 않고 당시 귀한 색다른 음식을 내놓으며 이 못난 놈이 달란다하여 불평 한마디 없이 주기 힘든 당시로서는 값진 자기 자식의 물건을 나에게 준 것은, 바로 그 무엇이 서로 통하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신근한 노동과 후더운 인정으로 가난과 싸워 오신 부모님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물질이 풍부한 시대에서 잘 살고 있다. 나는 부모님과 부모님세대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많은 빚을 지고 갚지 못하였다.

 

있을 때 잘하지 못하였으니 이제라도 친척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정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 뜻있는 삶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으로 부모님 세대들에게 진 빚을 얼마라도 갚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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