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돈 도적”이 된 적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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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3-08-30 16:54 조회277회 댓글0건본문
나는 현재 안양의 한 병원에서 일대일 고정 간병 일을 하고 있다.
한번은 752호 병실에서 56세의 간암말기 남자환자 곽씨를 맡았는데 거동할 수 없어서 기저귀를 차고 있었고 괴죄죄한 몰골에 소지품이란 기저귀 몇 장에 냄새가 풍기는 입던 옷 몇 견지를 검은 비닐봉지에 꿍져서 넣었고 현금 1만 3천 5백원이 전부였다.
현장 일을 함께 해왔다는 친구의 소개에 의하면 전라도에서 고아로 자라서 결혼한 후 두 남매를 낳았는데 이혼하고 안양에 와서 현장 일을 하면서 친인 한사람도 없이 고달프고 쪼들리고 고독한 생활을 20여년간 했단다.
하루는 현장 일에 나오지도 않고 연락도 되지 않아 저녁에 찾아갔더니 어두컴컴한 방바닥에 쓰러져 있기에 병원 응급실에 실어왔는데 간암말기 진단을 받았단다.
너무 불쌍한 마음에 나머지 현금 1만 3천 5백원을 봉투에 넣어 봉해놓고 퇴원 후 쓰라고 했다. 그런 후 내 돈 5만원을 꺼내서 기저귀며 생활용품들을 사서 썼다.
냄새가 풍기는 옷들을 빨아서 정리해 주려고하니 마구 거절하는 것이다. 그러니 비닐봉투에 넣은 옷 주머니를 그대로 옷장 제일 밑에 넣고 그 위에 기저귀들이랑 넣었다.
이것을 알게 된 담당의사인 최 과장님께서도 자기돈 5만원을 내놓으면서 함께 쓰라고 했다. 또 병원에서도 수급자 수속을 시작했다.
5인실인 752호 병실은 암 환자들 병실인데 기타 환자들은 화장실은 갈 수 있는 상황이라 간병이 없었기에 밥상처리나 식용수준비 등 일들은 내가 도맡아 해드리면서 화기애애하고 웃음이 넘치는 병실로 되여 모두 부러워했다.
2월 17일(일요일)날,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원무과의 황대리님께서 와서 수급자 수속이 되였으니 은행계좌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러자 환자는 냄새나는 자기 옷을 꺼내 달라고 했다. 옷 속에서 은행통장을 찾던 환자가 갑자기 “내 돈 백만 원이 잃어 졌다”고 소리를 질렀다.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돈이 없다고 해놓고 무슨 돈이 잃어졌냐?”고 내가 물었다.
“여기 백만 원이 있었는데 아줌마가 매일 옷장 문을 열었다 닫았다 했으니 아줌마가 훔친 거야!” 라고 했다. 기저귀를 꺼낼 때마다 옷장 문을 열었다 닫았다 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으랴.
갑자기 나는 백만 원을 훔친 도적으로 되어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여 가슴이 막 답답해 났다.
화기애애하던 병실이 삽시간에 공포 속에 잠겼다. “천사 같던 여사님이 어쩌면...”, “남을 잘 도와주니 착하다고 칭찬했더니 어쩌면...”
여기저기에서 수근 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으며 병실 환자들도 나를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순간 억울한 누명을 꼭 벗어야 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나는 황대리님에게 간청했다.
“경찰을 불러줄 수 없어요? 이 사건이 끝나기 전에는 이 병실을 떠나지 말아 주세요.”
황대리님은 흔쾌히 대답하고는 경찰에 신고했는데 10분도 안 되여 두 분의 경찰이 찾아왔다.
경찰까지 출동하니 7층은 더 난리가 났다. 경찰 한분은 환자와 대화하고 한분은 나를 데리고 복도에서 대화하였다. 나는 내 돈과 최과장님의 돈으로 물건을 사들인 영수증과 기록일지를 보여주면서 너무 억울하니 환자를 고소하겠다고 했다. 경찰은 웃음으로 넘겨 버렸다.
잠시 후 경찰들은 복도에서 의견교환을 하고 나는 병실 한쪽 켠에 서서 “뭐 내가 돈이 없는 거지같아 보여?! 오늘 당장 간병을 그만두고 집으로 가겠다”고 푸념질 하고 있는데 환자는 냄새나는 옷 속에서 5만원 짜리 돈을 꺼내서 세고 있었다. 나는 경찰들에게 빨리 확인해보라고 소리 쳤다.
경찰들이 급급히 와서 확인결과 70만원이였다. 그러자 환자가 또 “30만원 가져갔네.” 라고 소리쳤다.
경찰들은 “가져가면 다 가져가지 왜 30만원만 가져가겠냐?”고 했고 나는 옷가지들을 샅샅이 다 뒤져봐 달라고 간청했다.
또 60만원이 나왔다. 도합 백만 원도 아닌 130만원이였다. 경찰들은 나에게 위안의 말을 남기고는 떠나갔다.
억울한 “도적”누명을 벗었으니 간병을 그만두고 인젠 집에 가겠다“고 하니 간호사선생님이 나를 붙잡고 환자가 잘못했다고 사과하면 가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청들었고 환자도 울먹거리면서 “내 어디 아줌마 가졌다고 했어, 가지마.”하고 후회스런 말을 건네기도 했다.
사실은 환자가 돈이 없다고 말해놓고는 친구를 시켜 통장에 있던 돈을 다 찾아서 여기저기 숨겠는데 암치료를 받는 환자라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한창 피 주사를 맞고 있는 환자를 보노라니 쾌심한 감정과 불쌍한 감정이 교차되면서 눈 굽이 젖어들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오늘 피 주사 끝나면 내일은 꼭 가겠다.”고 대답했다.
그 난리를 겪고 나니 7층에 있는 모든 간호사들, 직원들, 간병인들, 환자들도 무두 나를 알게 되였고 나에게 그만두고 집에 가라고 하는 분들도, 인정이 없는 환자라고 욕하는 분들도 많았다.
이튿날 아침, 일찍 출근하신 최과장님께서 그 소식을 듣고 여덟시도 되기 전에 병실에 와서 두 손 모아 쥐고 “여사님,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여사님 덕분에 환자의 병이 호전되였는데 가지 말아 주세요.”하고 거듭 말했다.
나는 백만 원짜리 도적으로 의심받던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울컥해서 얼굴을 싸쥐고 복도로 뛰어나갔다. 뒤따라 나온 최과장님께서 위로해 주면서 얼마 후이면 호스피스 병동(3층)으로 옮겨갈 것 같으니 그동안 더 고생해 달라고 하였다.
얼마 후 환자가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게 되였는데 수간호사 선생님은 또 무슨 일이 또 생길 가봐 호스피스병동 간호사들이 와서 짐을 꾸려가게 하란다. 나는 다른 사람을 옆에 증인으로 세우고 짐을 꾸려 주었고 환자는 내 손을 잡고 “나 그곳에 가기가 무서워” 하면서 울먹거렸다. 자기 병세를 모르는 환자다. 나는 간병 비를 줄 돈이 없어서 3층에 간다고, 지금 간병비도 최괴장이 지출했다(사실)고 안심시켰다.
간병하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 불쌍하고 측은한 생각에 간식거리랑 잘 챙겨주었다.
호스피스병동에 간 후 방문객이 없는 환자라 나는 주일마다 한 번씩 과일을 사들고 찾아가서 위로해 주었다.
처음 찾아 갔을 때 3인실에서 두 분의 할아버지들과 함께 있었는데 역시 두 손으로 내손을 꼭 잡고 눈물이 글썽하여 “아줌마 나 무서워요”라고 했다. 저도 눈 굽 적시며 한참 위로해 주고 사가지고 간 식품주머니를 안겨주고는 돌아왔다.
두 번째 주말에도 찾아 가니 환자가 중환자실로 옮겨 갔었다. 내가 중환자실에 들어서자 환자가 “아~ 우리 아줌마 왔다”고 높이 소리쳤다. 그 소리에 조무간호사님들이 모여오면서 “친척이 없다면서 무슨 헛소리냐”고 책망하였다. 아마도 내가 간병인 옷을 입었으니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환자 옆에 가서 손을 잡아주고 웃으면서 “맞아요. 이 환자분 문안을 왔어요.” 하면서 과일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간호사 선생님들은 의아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간병했던 환자라고 자아소개를 하고 과일꾸러미를 펼치자 “그 환자는 그걸 먹으면 안 돼요” 라고 하는 것이였다.
환자는 “아줌마가 가지고 가서 드세요” 하면서 거절하였다. 나는 수고하시는 간호사선생님들께 드리라고 하면서 넘겨주었다.
내가 세 번째로 찾아가서 곽 아무개를 만나려 왔다고 하니 문밖 당직선생님이 기록일지를 보더니 그런 환자가 없다고 했다. 먼저 주말에 문안 왔었다고 말하니 몇 장 더 펼쳐 보고는 “3일전 하늘나라로 갔어요”라고 하는 것이였다.
먼저 번에 환자상태가 좀 좋아진 것 같아서 오늘은 더 좋아졌겠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밖이였다.
마지막 길에 위로의 말 한마디도 못해준 것이 몹시 서글펐다.
억울하던 때를 생가하면 괘심하면서도 불쌍하고 맘속으로 욕하면서도 잘 돌봐주는 것이 아마 간병인들의 천직인가 본다.
/태순음
경기도 안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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