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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그리운 나의 고향 하마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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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3-08-21 18:10 조회2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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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 누구나 자기의 고향을 잊지 않고 그리워하면서 한번이라도 변화된 고향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그것은 아마도 부모님이 생명을 주어 철부지 때부터 그곳에서 땅 내음을 맡고 산천의 기운을 받으면서 성장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고향 하마탕은 아름다운 사방산을 끼고 있고 가야하 지류가 흐르는 산 좋고 물 맑은 고장으로 옛날부터 도막나무에 쌀밥을 먹는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왕청현에서도 세 번째로 큰 유명한 농촌마을로 연변일대에서는 살기 좋은 고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향 소재지 신흥마을은 대표적으로 70년대까지만 하여도 문화생활 수준이 월등하여 다재다능한 인재들을 엄청 많이 배출한 곳이다. 용트림을 치며 활약한 수많은 유능한 인재들이 지금도 많은 곳에서 활약 중이다. 한때는 수많은 영웅호걸들을 배출한 상징적인 왕청현의 규모가 큰 농촌의 중심지인 공사마을이였다.

 

그렇게 들끓던 향 소재지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웃고 떠들고 장난치면서 가는 곳마다 수 없이 많은 발자취를 남기였던 고장, 학창시절의 꿈과 청춘을 자랑하던 추억 있는 곳이다. 고향 생각을 하면 항상 자호감을 느끼고 그 곳에서 태여 났다는 그 자체가 기분 좋게 뿌듯해진다. 고향을 떠났어도 나의 뇌리에는 언제나 고향의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도 지나칠 수 없는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오늘 하마탕향 부흥촌 개인집에서 사양하는 큰 소가 병에 걸렸다고 다급한 목소리로 치료를 요청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급기야 그곳으로 달려가서 진찰하고 치료를 끝내고 나니 시간의 여유가 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살던 고향마을이 그리워 차머리를 돌려 꿈에도 그립던 신흥촌으로 향하였다. 마을 동구밖에 도착하여 보니 그전에는 먼 곳에서 봐도 한눈에 확 안겨오던 고향 마을이 예전 같지 않고 번화하고 생기가 넘치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썰렁하고 조용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상상외로 완전히 변한 고향 모습에 깜짝 놀라서 가슴이 아팠다. 모두들 알다 싶이 그전 집체 생산대 때에는 신흥마을이 500여호로 질서 정연하게 건설된 농촌 모범 마을이였다. 조선족들로 구성되여 오붓이 모여 살던 인품 좋고 살기 좋아 뭇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고장이였다.

 

그러던 하마탕 신흥촌도 1983년부터 개혁개방으로 토지 도급제를 실시하면서 집체화가 없어지고 밭을 개인들에 나누어 농사짓게 하였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농경 일로는 수입이 안 되여 포기하고 다른 사람한테 밭을 양도하고 외지로 또는 해외로 돈 벌이를 떠나기 시작하였다. 하나 둘 고향을 이탈하니 빈 집들이 늘어나고 인구가 줄어들고 갓난아기의 출생도 없어졌다.

 

학생들이 적어지더니 나중에는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 고중까지 모두 존폐 위기에 처하더니 나중에는 학교가 없어지면서 타지에 가서 입학하게 되였다. 그리고 향 정부도 없어지고 촌으로 강급 되더니 대흥구진에 소속되는 안타까운 현실로 되였다.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정든 고향을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하여 연변에서도 큰 집단 마을이라 불리던 규모가 큰 마을이 인젠 백여호 밖에 안 되는 고령화의 마을로 변하게 되였다. 인젠 역사에 옛말만 남기고 황량하게만 변해가고 있는 현실이여서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다.

 

어제 날의 하마탕 신흥마을은 향 소재지로서 하마탕 향 문화 중심지였다. 해마다 운동대회를 열고 각 촌에서는 신흥촌에 와서 3일씩 주숙하면서 낮에는 운동대회에 참가하고 저녁이면 각 촌별로 문예경연을 하면서 즐겁게 보내던 그때가 더없이 좋았었는데 이제는 지나간 먼 옛일로 되었다.

 

그 당시 신흥촌에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고 자호감을 느끼며 살았던지, 똑 마치 행운아로 느껴졌다. 그때 다른 마을에 사는 처녀들은 신흥촌 총각한테 시집오려고 중매군들을 앞세웠고 신흥촌으로 시집오는 것은 마치 행복의 지름길이라 생각했다. 그 당시 신흥촌에는 대흥구, 왕청, 장춘에서 하향한 지식청년들이 몰려오면서 정말로 흥성흥성했는데 마치도 생기가 넘치는 소도시와도 흡사했다. 그 후 지식청년들도 추천 받아 하나 둘 외지로, 도시로 빠져나갔다.

 

나는 20살 되던 해 처음으로 추천을 받아 고향을 떠나 학교를 갔는데 실습하러 다니면서 수 많은 곳을 다녀 보았지만 그래도 내가 태여 나서 자란 고향만한 좋은 마을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농학원을 졸업한 후 대흥구진 수의소에서 오라고 요청했지만 가지 않고 고향의 하마탕 수의소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집이 곤난하여 정부와 마음씨 좋은 이웃들의 방조를 많이 받았기에 대흥구진의 요청을 거절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하마탕에서 영원히 살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마탕 수의소로 출근하였고 나의 아내는 하마탕향 위생원에서 호사장과 산부인과 의사로 근무했다. 우리 부부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직업이라 그전의 곤난할 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신세를 갚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휴식일이 따로 없이 어느 곳에서 부르면 거기에 나타나 진심으로 도와주고 여려운 일이 있으면 제때에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마탕에서 근무하는 동안 우리부부는 베풀면서 살았기에 마을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으며 정부로부터 여러차레 선진사업자 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산지사방으로 떠나고 하마탕향 정부마저 없어지면서 나도 부득이 하게 현성으로 전근되여 고향에서 끝가지 살려던 생각을 정리하고야 말았다. 그러던 중 우연하게 고향마을에 들려보니 하마탕향 정부 간판까지 종적을 감추고 하니 마치 부모 없는 고아처럼 서운한 기분이 든다.

 

이러한 가슴 아픈 현실은 내 고향 하마탕 뿐만 아니라 모든 조선족 사회의 현실이다. 점점 소실되는 우리의 전통 문화가 뼈아프게 느껴진다. 유치원에 가면 어린이들이 노래하고 춤추면서 뛰 놀고 학교에 가면 교실마다 글 읽는 소리 랑랑하고 명절이면 민족 복장을 차려입고 춤추며 노래하고 운동대회로 들썽하던 모습은 다시는 찾아 볼 수 없다. 지나간 우리 세대들의 활동적이었던 옛 시절이 너무너무 그립다.

 

하지만 앞으로도 하마탕이라는 곳은 나의 부모님의 뼈가 묻혀 있는 땅이며 내가 태어나고 성장하였던 곳이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해도, 한번 고향은 영원한 나의 고향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태어나고 내가 성장한 고향 하마탕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전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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