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살어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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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2-10-29 19:26 조회410회 댓글0건본문
제7회 애심여성컵 전국조선족여성생활수기 수상작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로 인해 작년 2월부터 생각지도 못한 집콕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매일매일 늘어나는 확진자수와 사망자수 게다가 무성하게 부풀어 떠도는 헛소문까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혼자서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던 중 시골에 계시는 마다매(시집가서 이웃으로 살던 아줌마인데 아들이 “마다매”라고 불러서)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인젠 외출도 허락하는데 집에 혼자 있지 말고 시골에 내려와 함께 있자고 하였다. “마다매”도 남편이 한국에 계시다나니 혼자인지라 난 흔쾌히 대답하고 시골로 향했다. 가끔씩 일 년에 한 두 번은 다녀갔지만 그동안 집콕생활에 이번 시골 행은 더 남달랐다. 늘 본가 집 엄마처럼 챙겨주던 시골의 “마다매”랑 엄마들에게 삼겹살이며 여러 가지 야채며 과일들을 사가지고 시골로 향했다. 잠깐의 쉼으로 다녀온다던 시골행이 나에게 기적 같은 일상을 가져다주리라곤 생각도 못한 채...
때는 바로 5월 2일이었다. 현성에서 시골까지 버스로 한 시간 반 거리 마을에 도착하니 저녁무렵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마스크를 벗는 순간 청산한 시골공기에 마음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마다매”랑 엄마들이 버스 역에서 날 기다리고 계셨다.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반가운 만남이었다. 가지고 간 선물보따리들을 엄마들에게 안겨드리자 엄마들은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썼냐면서 모두들 반가운 기색들이었다.
웃고 떠드는 사이 어느새 마을 젤 서북쪽에 자리 잡은 “마다매”네 집에 도착했다. “마다매”는 순식간에 미리 준비해두었던 저녁밥상을 한상 가득 차려 놓았다. 새콤 달콤 민들레 고추장 무침, 집에서 기른 토종 닭알로 만든 새노오란 닭알 지짐, 내가 좋아하는 구수한 냉이 된장국...
밥 한공기 뚝딱 비우고 나니 씻을 새도 없이 그 자리에서 혼곤히 잠들고 말았다. 끝없이 펼쳐진 풀밭에서 새하얗고 포동포동한 새끼돼지 한마리가 나의 품에 확 안겨드는 것이었다...
깨고 보니 꿈이였다. “마다매”는 재물이 생길 좋은 꿈이라 해서 괜히 기분 좋았다. 그렇게 나의 시골생활이 시작되였다.
우리 마을은 원래 2백여 호에 1,200여명의 인구를 가진 꽤 큰 조선족촌이였다. 출국, 연해도시 진출, 현성으로 떠나가고 나니 지금은 겨우 이십여명 밖에 남지 않았는데 대부분 칠십 좌우의 노인들 뿐이였다. 마을의 지부서기 겸 촌장인 박성대는 나와는 초중 동창이였다.
한국의 돈 벌 기회, 현성의 우월한 조건도 마다하고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에 남았던 것이다. 내가 도착한 이튿날 바로 찾아와서 그동안 고향 분들 코로나 때문에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다고 하면서 어떻게 하면 고향 분들께 즐겁게 해드릴지 함께 연구해보자는 것이였다.
거의 모두가 방역 때문에 자식들 뿐 만 아니라 마을사람들끼리도 함께 설, 보름 여성의 날. 청명을 홀로만 쇠야 했던 만큼 곧 돌아 오늘 일요일 날 엄머니 절을 내가 쇠여 드리기로 했다. 박성대 지부서기가 먼저 향정부에 청시하여 허락을 받아낸 후 난 며칠의 시간을 짬짬이 이용하여 명절준비에 서둘렀다.
음식으로부터 오락 활동, 상품까지 “마다매”와 둘이서 빈틈없이 준비했다. 방역시기인 만큼 철저히 방역수칙을 지키면서 말이다. 어머니 절 날 새벽부터 일어나 음식을 장만하기 시작했다. 전날 미리 장봐온 돼지고기로 먹음직한 수육, 소고기회 무침, 물고기 매운탕, 닭고기 찜, 나물반찬에 햇 쑥으로 만든 인절미까지 한상가득 차려서 점심식사로 온 마을 어르신들 대접하였다.
몇 달 만의 회식모임이이라 모두들 너무나도 맛있게 드시면서 너도나도 칭찬을 해주셔서 난 몸 둘 바를 몰랐다. 부모님 같은 고향 분들에게 대접하는 것이라 응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르신들은 너나없이 먼 곳에 있는 자식들과 화상채팅 하면서 현성의 김선생님이 오셔서 어머니 절을 쇠여 드린다고 침이 마르도록 자랑들 하시는 것이였다.
식사대접 후 오후시간을 이용해서 네 조로 나누어서 게이트볼 시합을 조직하였다. 시합이 끝나자 마리 준비했던 상품들을 나누어 드렸다. 상품은 비록 커피 잔과 세수수건에 불과했지만 환하게 웃으시면서 좋아하시는 모습들을 보니 괜히 마음이 흐뭇해지면서 뿌듯해났다.
목릉강변에 자리 잡은 우리 마을은 땅이 비옥하였고 벌이 넓었다. 5월 초순이라 들판에는 민들레며, 냉이, 달래, 물쑥, 미나리... 나물 천지였다.
나물로는 무침, 찌개, 된장국 그리고 또 냉이와 미나리소를 넣어서 만든 물만두와 빵은 그야말로 별미중의 별미였다. 그래서 짬만 나면 나물 캐서 말리고 데쳐서 냉동하군 했다. 비오는 날이면 미나리, 냉이소를 넣고 물만두를 빚어 한가마 가득 삶으면 “마다매”는 한 그릇씩 가득 담아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아서는(물만두 배달아요) 외치면서 한집, 한집씩 떡을 나르군 하셨다. 이것이 바로 도시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시골인심이 아닐까?!
혼자서 고생해서 온 마을 사람 호강한다고 이처럼 맛있는 물만두 처음이라고 엄지손가락 내밀 때면 왜 그렇게도 신나고 좋던지. 그래서 겨울에 더 맛있는 떡을 많이 해먹으려고 나물들을 많이 장만하던 중 친구와 통화하면서 시골자랑 하다가 친구가 《봉화야, 시골에 흔한 것이 나물이니 많이 캐서 나물을 상업화 시켜보렴.》하는 것이였다.
친구의 말에서 힌트를 받고 엄마들과 나물을 많이 캐서 돈을 벌면 어떨까고 여쭈어봤더니 엄마들은 흔해 빠진 게 나물인데 누가 사먹느냐면서 반신반의해 하셨다. 나도 그랬다. 어떤 일이나 시작하려면 두려움이 앞서군 했다. 두려움이란 막상 해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앞선 상상으로 우리의 발을 붙잡아 시작조차 하기 힘들게 만드는 그런 것이였다.
그래서 처음엔 나의 모멘트에 나물의 효능, 음식요법을 소개하고 음식사진 까지 올렸더니 웰빙음식을 선호하는 시대라 생각밖에 반응이 좋았다. 그러더니 여기저기서 자연산 나물을 어떻게 구입했냐는 문의가 빗발쳤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엄마들이 나물을 캐어오는 족족 마을 버스에 현성에 보내고 먼 곳은 택배를 이용하였다. 많이 캐는 날에는 엄마들의 한사람 수입이 거의 2백원씩이나 되었다. 그렇게 나물을 캐서 팔고 미처 팔지 못한 것은 데쳐서 말리우거나 장아찌를 만들어서 친구들에게 먼저 맛보라고 보내주었더니 연태의 친구는 오랜만에 엄마의 손맛이 푹 배인 요리를 맛보았다면서 자주 먹게 살 수 없는가고 문의하는 것이였다. 그래서 하게 된 것이 짠지를 만든 것이였다.
고추 장아찌, 오이지, 나물 장아찌. 그렇게 만들어서 여러 곳에 택배로 팔기 시작했다. 우리고장은 땅이 고추농사에 적합한 땅이어서 고추마을로 소문이 났었다. 알뜰하게 가꾼 고추를 깨끗하게 말려서 디딜방아로 찧은 고춧가루는 그야말로 상등 고춧가루였다. 그 고춧가루로 만든 영채, 갓, 배추, 무우김치까지 팔다나니 봄부터 겨울까지 엄마들의 수입은 꽤 쏠쏠하였다. 처음엔 약 살 돈을 벌었소. 그러더니 고기 값을 벌었소, 손군들 줄 용돈 벌었소 하면서 모두들 너무나 흡족해들 하셨다. 돈도 벌고 할 일도 생겨 건강에도 좋다면서 그야말로 일거삼득이라고 하신다.
금방 시골에 왔을 땐 오월 초순이라 터전의 곡식을 다른 집들보다 좀 늦게 심게 되었다. 아침이면 잠든 나를 깨울 가봐 대문 옆에 채소를 놓아두고 가군 하는 엄마들. 새벽 낚시질한 메기며 붕어를 그대로 놓고 가군 하시는 아버지들, 이런 시골인심에 목멘 적이 얼마였는지 모른다. 현성에서 어디가나 마스크를 쓰고 다니다가 시골의 청신한 공기를 마실 때 가슴 뻥 뚫리는 그 느낌, 시골의 닭, 게사니, 개, 소... 짐승마저도 정겹게 느껴지는 그 느낌. 그래서 시골생활에서의 한 가지 취미인 셀카 봉을 들고 찰칵. 꽃 앞에서 벼 밭에서, 터전에서, 심지어는 둥글 소와도 찰칵, 나만 아니라 엄마들도 셀카에 푹 빠져버렸다. 그렇게 잠간의 시골여행이 시골생활에 푹 빠져 일 년이 넘어간다.
사람들은 코로나 때문에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들 한다. 그렇다 많은 것이 변했고 변해가고 있다. 그러나 변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을 시골생활이 일깨워 주었다. 갑자기 금방 시골에 내려왔던 날의 돼지꿈이 생각난다. “마다매”는 돼지꿈은 부자가 되는 꿈이라고 했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시골생활은 나의 아픈 몸과 마음을 치유해주었고 고향사람들의 따뜻한 사랑은 나의 마음을 넘쳐나게 채워줘서 이 세상에서 사랑이 넘쳐나는 마음의 대부자로 만들어 주셨다. 시골에 살어리랐다.
오늘도 내일도...
/김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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