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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만남과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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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3-01-30 17:27 조회340회 댓글0건

본문

인생은 만남과 이별의 반복이고 우리는 이 세상을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에서 살고 있다. 나는 간병 일을 하면서 무수히 많은 만남과 이별을 경험했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로 병원에서 간병인과 환자로 만나 함께 한다. 

 

남남인 우리지만 속마음도 터놓으면서 같은 만남에 다른 이별을 맞이한다. 간병인의 이별에는 완치되어 퇴원하는 좋은 이별과 병의 악화로 영영 볼 수 없는 슬픈 이별도 있다.

 

그동안 병원에서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겪으면서 나에게는 표현할 수 없이 아픈 잊을 수 없는 이별이 있었다. 바로 한림대 부인과에서 난소암 환자와의 "만남과 영별" 이다.

 

선임 간병인이 간병 비를 턱없이 많이 달라고 해서 간병인을 교체한다고 했다. 간병 비는 남들에 비해 적게 책정되긴 했다. 간병비가 적으면 그만큼 일이 쉬울 거라 생각하고 나는 주저 없이 수용하였다.

 

때는 메르스 종식이 가까워지는 시기였지만 대학병원 출입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였다. 병원입구에서 번거로운 등록을 마치고 출입증을 발급 받고 곧바로 병실로 올라 같다.

 

50대 후반의 가냘프고 조용한 성격의 환자였다. 난소암 말기에 암세포가 이미 간, , 신장, 방광에 전이된 상태였다. 끌고 간 캐리어를 작고도 낮아 볼품없는 간병인 보조침대에 던져놓고 병실에서 기다리던 큰딸로부터 환자의 상태를 인계 받았다.

 

말기 암 환자인데 상태는 양호한 편이였다. 부축하면 움직일 수도 있고 인지능력도 좋았다. 오심과 구토가 있어서 금식하고 영양제 주사로 유지하고 있었다. 방광전이로 혈뇨가 있고 화장실을 자주 다니는 편인데 병실에 화장실이 없어 공용화장실을 다녀야 해서 좀 불편했다.

 

환자가 착해서인지 처음부터 나에게 호감을 주면서 "죽기 전까지 언니가 나를 책임져 주세요, 꼭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해주세요."하고 끈질기게 부탁하는 바람에 당황하여 대답을 못하였다.

 

환자를 부축하여 복도에서 산책시켜주며 아직 그런 대화는 좀 이르니 "현재를 즐기지는 못하더라도 고통 없이 마음 편히 지내는 게 좋겠어요."라고 하며 위로해주었다. "죽음은 두려운 거 아니예요. 삶의 끝은 죽음이고 누구나 맞아야 하는 일인 만큼 너무 슬퍼하지도 말고 남은 삶을 잘 살아 봅시다.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 테니 믿고 의지해도 됩니다." 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밤사이 환자가 화장실을 드나드느라 잠을 설치였다. 새벽에야 잠들었는데 430분쯤 되여 엑스레이 촬영을 가라고 간호사가 깨운다. 부인과 간병은 처음이라 새벽마다 엑스레이 촬영이 있을 줄은 몰랐다. 촬영실에 내려가니 많은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보아왔던 쭉쭉 빵빵한 멋쟁이 젊은 색시들은 환자용 원피스를 입어도 이뻤다.

 

순번을 기다리며 휠체어에 앉아 졸고 있는 환자의 귀가에 "미인들은 병원에서도 이쁘네요." 하고 속삭였다. 환자는 나의 속삭임에 키드득 웃음을 터뜨리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와서 교수님 회진까지 환자는 잠들었다. 아침 배식 시간 때 환자의 두 딸님이 햇반과 과일이랑 음료를 사들고 와서 "이모님 드세요. 엄마가 이모님을 너무 좋아하네요. 잘 부탁합니다."하고 깍듯이 당부한다. 보통 간병인을 "여사님" 이라 부르는데 스스럼없이 이모님이라 부르니 친근감이 있고 존경을 받는 느낌에 기분이 좋았다.

 

나는 딸님들을 복도로 조용히 불렀다. "겨우 하루 만에 말씀드리기 미안한데 엄마 상태면 간병 비를 올려야 해요."라고 제안했더니 쾌히 응해주었다. 전임 간병인은 엄마가 싫어해서 핑계로 보냈다고 이모님은 적은 간병 비에도 응해주시니 고맙더라고 남들보다 더 드리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 말에 괜스레 미안하고 민망스러웠다.

 

교수님 회진시간이 다가오자 환자를 깨워서 말끔하게 씻어주고 환의도 새로 갈아입히고 머리를 조심스레 빗어 다듬어 주니 한결 깔끔하였다. 침상과 주변을 정리하고 레드를 돌려 침대 상체를 30° 올려 환자를 비스듬히 눕히고 담요를 가슴 선까지 덮어주니 아주 정결하고 완벽하였다.

 

교수님이 회진을 오셨다. "며칠 후 퇴원하고 20여일 지나서 다시 입원하라"고 말씀하시면서 환자에게 아주 친절하셨다. 교수님의 따뜻한 격려의 말씀에 친숙한 느낌이였다. 퇴원 허락에 환자는 부푼 설레임으로 기분이 좋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환자라 될수록 바깥 환경을 만끽 시키고 싶어 링거를 달고 휠체어로 정원에 산책 나갔다. 청신한 주변 환경이 마음치료에 덤이 될 것 같았다. 때는 늦은 여름이라 산책하기 딱 좋았다. 병원 산책길은 록화도 정자도 이쁘게 잘 돼있어 휴식하고 대화하기 좋은 환경이다. 환자도 다인 실이라 병실보다 정원을 더 좋아했다. 그 보다 나하고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 밖을 더 선호 했는지도 모르겠다.

 

정원에 나와서 퇴원하면 꼭 집에 같이 가 달라고 또 간절하게 사정한다. 나는 자택 입주 간병은 일절 사절해 온 터라 응하지 않았다. 환자는 흔히 듣던 구구절절 가정사가 아닌 아픈 이야기 보짐 하나 터뜨려 놓기 시작하였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그는 중국에 기업을 세우고 사업하는 남편이 다른 살림을 차려서 딸 둘을 결혼시킨 후 남편과 이혼하고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었다.

 

돈이 생기면 아내를 바꾼다는 말처럼 그녀의 남편도 돈 좀 벌었다고 고생한 아내를 내치고 다른 여자를 좋아한 나쁜 남자였다. 담담히 듣고만 있던 나는 언제부터인지 그녀의 이야기 속에 빠져 함께 훌적이고 있었다.

 

마음속에 지옥 하나쯤은 품고 사는 조강지처 할머니들을 병원에서 많이 보아 오면서 같은 여자로서 측은이 값싼 동정만 해왔었는데 오늘 이 환자한테는 유독 마음이 쓰인다. 남편의 배신으로 받은 상처가 환자의 인생을 무너뜨렸다. 그는 비극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잘못은 "나쁜 남자"가 했는데 그녀가 힘들어 했던 흔적에 가슴이 아프다. 위로 외에 달리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이다.

 

딸들이 결혼 할 때까지 숨 죽인채 남편의 잘못을 덮어주느라 마음의 병을 키워서 육체의 병까지 가져온 환자다. 가만히 서 있을 힘도 없이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환자를 병원 산책길 나무 밑에서 꼬~옥 안아주었다. 몸보다 영혼이 더 지쳤을 지나온 세월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마음껏 울고 분노하라고 위로했다.

 

환자는 배신으로 인한 억울함 속에서도 배신의 상처를 가슴속 깊이 묻어두고 자신의 행복을 희생해야만 했다. 딸들이 커서 결혼하기를 기다리며 기나긴 세월을 눈물로 보냈다고 한다.

 

자기를 이해해 주는 나를 만난 게 행운이라며 꼭 임종까지 곁에 있어 달라고 얼마나 절절하게 부탁하는지 마음이 아팠다. 울컥해서 또 한번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휠체어에 앉은 환자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걱정 말아요. 내가 지켜줄게, 내가 이손 놓지 않고 꼭 곁에 있어 줄게요."하고 위로해 주었다. 시한부 판결을 받고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삶이 너무도 쓸쓸했다.

 

여전히 화장실은 자주 다녔고 한번가면 20분 정도씩 나는 화장실 앞에서 기다려 주었다. 손 씻겨주고 얼음을 퍼다가 얼음주머니에 넣어서 냉찜질도 해주었다. 부인과에서 이처럼 냉찜질 치료를 많이 하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얼음 생성기까지 큰 걸로 갖추어 놓아 얼음이 수시로 만들어 지는데도 가끔씩 비축이 떨어져 얼음이 없을 때도 있다.

 

나는 환자가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케어를 잘 해주었고 환자도 부담 없이 나에게 의지한다. 딸님들이 햇반도 종류별로 이것저것 골고루 사다주고 간식거리도 다 먹지 못할 정도로 많이 사다줘서 옆방 간병인들과 나눠먹었다. 금식하는 환자 곁에서 먹기가 미안하여 나는 간식마저 탕비실에 가서 먹고 음료도 복도에 나가서 마시 군 했다. 금식환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어느 날 혈뇨가 더 심해지더니 오후에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 졌다. 피검사에 혈소판 수치가 많이 저하된 상태라 출혈하면 위급상황으로 갈수도 있다. 임종병실은 아니지만 급히 일인실로 옮기고 병원에서 보호자에게 연락하였다.

 

연락을 받고 이혼한 전 남편도 병문안 왔다. 싸늘하리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분위기는 화기가 있었다. 서로 미워할 줄 알았는데 잘못을 저지른 "나쁜 남자"가 많이 미안해하고 기가 죽어 있었다. 환자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전 남편이 손을 꼭 잡아주면서 "얼마나 힘드냐? 힘내라." 한다. 환자는 맥 풀린 손을 힘없이 맡긴 채 전남편을 하염없이 바라만 본다.

 

손과 입귀는 가늘게 떨고 있었고 미움과 원망은 다 용서한 듯 눈빛이 날카롭지 않았다. 마음의 상처를 잊으려니 얼마나 아플까? 임종이 다가오는 이 시각에 환자는 고통과 행복 사이를 오고가며 감정이 교차 되었을 거라 생각된다. 지켜보던 나는 아린 마음을 안고 자리를 피해 문밖에 나와 있었다. 환자가 더없이 가엽고 불쌍하였다.

 

둘만의 시간이 한참 지나서 "나쁜 남자"가 불렀다. 수표 두 장을 주면서 잘 부탁한다고 정중히 인사한다. 어쩐지 미운 마음이 생기면서 나는 수표를 거절하였다. "간병 비를 받고 일하니 촌지는 받지 않습니다." 하고 차갑게 쏘았다. 조강지처를 버린 이 "나쁜 남자"를 마주하는 순간, 까닭이 뻔한 미움이 확 올라오면서 나의 표정은 굳어졌다. 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에 티내는 스타일이라서 차가운 말과 같이 표정도 쌀쌀 맞았다.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나쁜 남자""아줌마가 뭔데? 왜요?" 하는 눈빛으로 나와 마주하고 섰다. 황당하다는 눈치였다. 환자는 나에게 눈치를 줘도 내가 단호하자 "언니, 나를 봐서라도 받아주세요." 한다. 마지못해 받으면서도 솔직히 수표를 건네주는 그 손마저 역겨웠다. 뭐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턱까지 차올랐는데 차마 소리로 내 뱉지는 못했다.

 

"나쁜 남자"가 돌아가고 환자는 서럽게 울었다.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구슬프던지 큰 딸님과 나 셋은 한 덩어리가 되여 한참이나 눈물범벅이 되였다. "모든 걸 용서하고 내려놓고 가겠어요." 하면서도 환자는 힘없이 긴~ 한숨을 톺았다.

 

모두가 돌아가고 환자는 밤새도록 응급상태에서 힘들어 했다. 소변이 없어 소변 줄 했음에도 소변 한 방울도 없다. 위독한 징조다. 응급 대책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다. 아침에 혈압이 떨어지고 산소수치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환자는 의식을 잃고 숨이 차 헐떡인다. 긴급호출을 하였다.

 

"빨리 와주세요. 긴급합니다." 재차 호출해서야 간호사 2~3명이 뛰어 왔다. 산소포화도가 몇초 사이에 뚝뚝 떨어지면서 혈압 맥박이 급격히 내려가더니 모니터링에는 직선이 쭈~욱 나타났다. 불과 몇분 사이에 심폐정지 상태로 사망이 선고 되였다.

 

살고 싶은 날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삶은 환자에게는 허락하지 않았다.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임종을 맞는 말기 암 환자들의 다반수와는 달리 너무 급하게 떠났다. 친인들과의 이별도 못하고 큰 딸만이 외롭게 지키는 임종을 맞아 급하게 서둘러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삶을 살다 눈물만 세상에 뿌려놓고 ...

 

매번 그렇듯이 운명한 환자의 짐 정리는 쓸쓸하고 슬프다. 나는 환자의 짐들을 정리해서 박스에 포장하고 내용물을 일일이 박스표면에 적어놓고 박스를 복도에 쌓아놓았다. 큰 딸만 남겨두고 갈 수 없어 다른 유가족들이 오기를 기다려 주었다. 딸님은 갑자기 닥친 일이라 그런지 울지도 못하고 덤덤해 있었다. 나는 소파에 끌어다 앉히고 말없이 안아주었다. 그제 서야 내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오열하였다. "이모님, 엄마가 넘 불쌍해요. 우리 엄마가 불쌍해서 어떻게 해요."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가슴을 허비는지 나도 눈물을 쏟았다.

 

환자의 동생이랑 유가족들이 왔다. 나는 떨리는 소리로 고인에게 인사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엄마를 잃는 건 언제도 슬픈 일이다. 딸들의 흐느낌에 슬픔으로 가슴이 뻐개지는 듯 아픈 이별을 하고 나는 비틀비틀 병원을 나섰다.

 

오늘도 나는 환자와의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간병인의 삶을 살아간다. 나의 삶에 거쳐 가는 많은 인연이 만나면 기쁘고 이별하면 아쉽기만 하고 슬프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만남과 이별 속에 내가 있고 내 삶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일 것이리라.

/김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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