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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연합회(韩民族联合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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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나라 잃은 설음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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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3-03-03 14:59 조회3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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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331, 대한민국 국민들이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려고 "독립 만세"를 부른 104 주년 기념일이다. 

 

나는 한국TV "아침마당"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왜놈들과 싸우신 애국지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순간 돌아가신지 80년이 다 되는 나의 할아버지 이종면을 비롯한 가족들의 고생을 되새겨 보게 된다.

 

나의 고향은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매월리 장작터이다. 산 좋고 물 맑은 시골마을에서 증조할아버지 이규신은 자신의 부지런한 노동으로 산도 사고 땅도 사고 8간짜리 기와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고향에서 잘 살던 이야기를 할머니께서 늘 들려주셨기에 나는 201641, 중국에서 고향인 경기도를 방문을 하였다. 과연 좋은 고장이였다.

 

선조들은 왜 이리 좋은 곳을 떠났을까?

 

증조할아버지는 아들 이종면을 서당에 보내 공부 시켰다. 공부를 했으니 일본제국주의의 야만적인 통치에 불만을 가졌고 망국노에서 벗어나려고 마을사람들을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191931일에 "독립 만세"를 부르는 건 당연한 것이였다.

 

그러나 이것이 가 되여 36세인 할아버지는 왜놈 헌병대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받고 풀려 나왔으나 두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어 더는 농사일을 할 수 없게 되였다. 다른 재간이라도 배워 식구들을 살리려고 큰 기와집을 팔고 자그마한 초가집을 사서 식구들을 이사시켰다. 그 웃돈으로 상한 다리를 끌며 지팡이에 의지하여 걸어 서울로 다니면서 의학 공부를 하셨다.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이사한 후 집에는 일꾼이 없어 쪼들리니 할머니는 속을 태운 나머지 시력이 점차 저하되면서 눈이 어둡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아버지는 16세에 나의 어머니와 결혼하셨는데 언니와 오빠를 낳은 후 강제로 소위 봉사대에 붙잡혀 갔다. 나의 아버지는 일본 부대에서 말을 먹이고 마구간을 치는 등 고된 일을 했다. 생활환경이 열악하여 수시로 전염병이 돌았다. 아버지께서 이란 전염병에 걸리자 왜놈들은 아버지를 집에 쫓아 보냈다.

 

할아버지가 의사였기에 아버지의 전염병은 빨리 고칠 수가 있었다. 왜놈들이 아버지를 또 데리러 온다는 소문을 들으신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를 만주로 피난시키셨다.

 

그때 만주 목단강지구 팔면통에서 동쪽으로 산을 넘고 산비탈을 에돌아 10리 길을 가면 조선족 마을 평성촌이 있는데 거기에 나의 작은 할아버지가 계셨다. 1936년 봄, 아버지께서 평성촌에 오신 후 3년간 농사를 짓고 1938년 겨울에 식구들을 데리러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아이들 셋을 데리고 양평역에 내렸다. 기차를 타려고 소달구지에 있는 이불을 벗겨보니 우리 3남매의 몸은 불덩어리였단다. 홍역을 치르느라고 열이 올랐던 것이다. 할 수없이 고향 마을로 되돌아가고 이듬해 봄에 아버지는 혼자 만주로 가셨다.

 

아버지는 평성에서 또 2년간 농사를 지으신 후 1940년 겨울에 식구들을 데려오시려 했다.

 

앞 못 보시는 할머니가 돌도 안 된 동생을 업고 12세 되는 언니가 7세 되는 오빠와 5세 되는 나를 돌보고 아버지는 짐짝들을 건사하고 어머니는 차멀미로 꼼짝 못하고 팔면통까지 와서 평성촌에 무사히 도착하셨다.

 

아버지는 7년 동안 타향살이를 하다가 겨우 가족을 타향에 자리 잡게 했다.

 

그러나 만주도 일본 세상이어서 여전히 빈곤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이듬해 1941년에야 만주로 오셨다. 일본인들의 혹형으로 인해 얻은 병은 점점 더 심해져 1944년 봄에 62세로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실명하여 근 45년을 암흑 속에서 살았다. 1964년 봄에 아버지께서 촌의 일을 하시다가 56세에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그해 겨울에 86세로 돌아가셨다.

 

나는 어려서부터 일본 병사들이 하는 짓을 다 보았다. 군사 훈련을 하다가도 쉬는 참이면 백성들의 감자밭에서 감자를 뽑아 불에 구워 먹군 했었다. 백성들이 양식이 없어 굶게 되니 뜬 콩 깨묵가루를 주었다. 나는 그것을 먹고 한평생 위병으로 고생했다.

 

올해 88세인 나는 이런 걸 너무나도 많이 듣고 보았다. 오늘 우리가 평안하게 살게 된 것은 다 선열들이 피 흘려 싸운 덕분임을 대대로 잊지 말아야 함을 깊이 느끼게 된다.

/ 리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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