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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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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4-01-17 00:29 조회1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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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12월 27일은 나의 아버지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아버지 생전에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나로서는 아버지 탄생 100주년을 맞으면서 꼭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이 글이라도 아버지께 올리고자 한다.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나신지도 어느덧 14년이 되였다. 아버지 고향은 조선 함경남도 북청군 성대면의 한 시골이라고 들었다.

증조할아버지 때는 먹고 사는 것이 괜찮았었는데 그 후로 점점 가세가 기울어져 소문을 듣고 먹을 걱정 없다는 만주로 이주민으로 오게 되였는데 그 때 아버지의 나이는 겨우 14세였다.

그 당시 자리 잡은 고장이 지금의 왕청현 대흥구 하마탕 신흥툰이다. 아버지는 이주민으로 오면 학교도 다닐 수 있다는 한 가닥의 꿈을 안고 오셨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집안에 노동력이 부족하여 아버지는 학교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할아버지는 막내아들 삼촌을 학교에 보내면서 "넌 걔가 배우고 돌아오면 거기서 배우라"고 하셨다. 말이 쉽지, 후에 그렇게 되지 못하자 아버지의 글을 배우겠다는 꿈은 물거품이 되였다.

1945년 광복이 나서 마을에 야학교가 섰는데 아버지는 열정적으로 야학 공부를 다니셨는데 때론 일 밭에서 늦게 돌아 오시게 되면 식사도 거르시고 야학부터 다녀오셨다. 이렇게 열심히 배운 덕분에 아버지는 신문과 잡지도 볼 수 있고 편지도 쓸 수 있게 되였고 회의 내용도 기록할 수 있게 되였다.

인상 깊었던 것은 아버지께서 가끔 글씨를 쓰시고는 "돈을 들여 배운 공부면 더 잘 썼겠는데" 하시면서 학교 문에도 가 보지 못한 아쉬움을 자주 표현하셨다.

그래도 다행히 아버지는 야학교에서 배운 밑천으로 합작사, 인민공사, 호도거리에 이르기까지 몇 십년간 생산대 대장, 지부 위원 등 책임을 맡아 하셨다. 아버지는 회의 때마다 필기를 꼭꼭 하셨는데 50년대 초부터 2000년도에 이르기까지 몇 십권에 달하는 필기장이 있었다. 그리고 해마다 연변일보, 노년세계 등 신문 잡지들을 빼놓지 않고 구독하셨다.

아버지는 맡은 임무를 절대로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 "간부 노릇하려면 잠을 적게 자고 걸음을 많이 걷고 잔소리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아버지의 문화 수준은 높지 않았어도 하시는 말씀마다 유머 스럽고 사리에 밝았다. 그런 아버지 말씀에 촌민들은 아주 잘 따라 주었다. 아버지가 생산 대장직을 맡은 20여 년간 생산대 량식 표준과 수입 분배는 언제나 온당하게 진행되여 그 당시에는 중, 상등을 차지하여 처녀들은 우리 마을 총각들한테 시집오려고 애간장을 태웠고 소문을 듣고 이주 오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 형제 다섯 남매 중 셋은 여자여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이 집에 여자애가 많다고 하면 아버지께서는 "많소, 셋이요"라고 대답하셨지만 절대로 남존여비 사상이 없으셨다. 특히 학교 다니는 일에 대해서는 여자애라고 공부 안 해도 된다는 관념이 전혀 없었다. 우리가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다닐 때는 "독서 무용론" 이 판을 치는 바람에 많은 동창들이 학교를 그만 두고 생산대에 나와서 노동에 참가하였다.

그래서 한번은 내가 "아버지, 나도 학교를 그만둘까요?"라고 말씀드렸는데 아버지는 성을 내시면서 "자기를 위해 공부하지, 공부해서 남을 주냐?"고 하셨다.

소학교 시절, 내가 반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얘기를 듣고 많이 기뻐하셨고 자랑스러워 하시며 "우리 딸이 장래 부녀주임감"이라고 하셨다. 나중에 난 아버지의 예언대로 부녀주임은 못했어도 인민교사란 직업을 가지고 우리의 문화를 전파하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그 후 나는 연변 중국어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는데 첫 분배를 받아 교학을 잡은 학교는 우리 집과 20여리 떨어진 이웃 공사의 한 시골 마을이였다. 지금은 교통이 편리하여 20여리 거리는 문제가 아니 지만 그 당시는 어려움이 많았다.

토요일 오후 상과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오르면 거의 두 시간을 걸어야 집에 도착하군 했다. 그때마다 저녁 밥상에는 색다른 음식이 마련되였는데 아마도 내가 오는 줄 알고 미리 챙겨 두신 것 같았다. 이렇게 하루 밤 자고는 이틑 날 오후에는 또다시 시골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그때면 아버지는 하루 밤 더 자고 아침 일찍 서둘러가면 된다고 하셨는데 그때 외지에서 근무하던 4년 남짓한 기간 내가 걸은 길은 아마도 5천 리는 되는 것 같다.

또 주말이면 꼭 동구밖까지 나와 나를 기다리시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발걸음이 절로 가벼웠고 즐거웠다.

아버지는 성미가 활달하시고 얘기도 구수하게 잘하셔서 마을과 하마탕 내의 역사에 대해서도 손금 보듯 잘 요해하여 마치도 한 권의 살아있는 역사책 같았다. 그리하여 여러 신문사 기자들의 인터뷰도 많았는데 연변일보, 길림신문에 아버지에 대한 보도와 이야기도 여러 번 실렸었다.

아버지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싫어하셨고 누구에게 아첨하거나 굽실거리는 것도 싫어하셨다. 뿐만 아니라 형세와 시사를 아주 중시하셨는데 문화대혁명 시기 무단투쟁, 파벌투쟁 등에 아주 못마땅해 하셨다.

노년에 들어서 밭을 돌아보시고 논물 관리도 하셨는데 일생동안 밭일에서 잔뼈를 굳혀 오셨다. 때론 우리가 농담으로 아버지는 한평생을 기층에서 고생하면서 뭘 얻은 것이 있느냐고 물으면 그냥 웃어 넘기곤 하셨다.
그 밖에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셨는데 형제간과 친척들에게 손을 벌리는 걸 사절하셨다. 서로 만나면 이야기가 오고 가며 정말로 확기애애 하였다. 형제간의 일을 자신의 일 보다 더 념두에 두셨고 도울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도와주셨다. 아버지는 농촌에서 한평생 부모님을 모시고 다섯 남매를 키우시며 제일 기층에서 생산대장 직무를 충실히 완성하면서 일생을 마감하셨다… …

아버지께서 돌아 가셨다는 비보를 접했을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서울에서 안산에 있는 조카집으로 밤중에 도착해 아버지의 영정사진 앞에서 절을 올리고 꼭 돈을 많이 벌어 형제 자매들을 모두 잘 살게 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때 나는 연 며칠 아버지를 그려보며 꿈에라도 아버지를 뵐수 있기를 바랬지만 아버지는 끝내 나타나주지 않았다. 아마 나에게 짐을지워 주기 싫어서인 것 같다…

"아버지, 걱정 말아요. 꼭 저의 맹세를 현실로 만들 것입니다. 요즘 못 사는 것이 자랑은 아닙니다. 가난하면 어디 가나 떳떳하지 못하고 주눅이 들게 됩니다. 아버지,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지켜봐 주세요"라고 몇십 번 외쳤다.

우리 형제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오고 있지만 아직은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반드시 초심을 잃지 말고 아버지께 한 맹세를 현실로 만들어 가야 한다.

보고 싶고 그리운 나의 아버지, 내가 언젠가는 아버지를 만나게 될 그 날, 우리 형제들이 모두 함께 다 잘 살게 되였다고 꼭 말씀을 드릴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아버지, 많이 많이 사랑합니다, 아픔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면서 가끔씩 우리 현제들의 소식도 전해 들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오정옥

2024. 1. 15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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