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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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6-02-08 18:38 조회7회 댓글0건본문
울 아버지는 울진진 장씨 22대후예이고 오형제의 막내다. 원래 마음이 착하고 부지런하며 배우기를 즐겼다. 초등학교 필업하고 반주임 선생님의 추천으로 전교 세명의 한 학교 학생들이 손잡고 멀 고먼 바다를 넘어 일본으로 새로운 고학길에 올랐다.
당시 생활이 곤난했기에 낮에는 아르바이트로 신분배달을 했고 저녁에는 상업 공부했는데 당시 주산놓기는 그반급에서 앞자리였다.그시기 일본에 자주 지진이 일어나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학생들을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내보내기에 다시 귀국의 길에 올랐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소학교 교원으로 사업했다. 업무능력이 강하고 사업이 출중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부책 (교장)으로 승급했다. 부책이라지만 지금의 교장과는 달리 모든 일에 앞장섰고 겨울에는 교원들이 산에 가서나무를 해와서 패서 난노를 피웠고 여름 장마철이면 강이 불어 학생들이 집 돌아가기 힘들면 한학생 한학생 업어서 강을 넘었다. 글구 교원 부족으로 복식반 형식으로 교학했는데 자식 여섯은 모두 울 아버지 수업을 받았다. 저녁에는 언제나 등잔불 밑에서 학생들 숙제 검사,시험지 채점,작문수개를 하는건 매일 매일 큰 과제다. 이런 어버지의 피타는 노력이 있었기에 매년 울아버지 반학생은 상급학교로 가는 비률이 제일 높았다.
울 아버지는 아주 정직한 분이다.학교에서 밭도 다루고 다종경영도 했는데 농사도 잘 되였고 닭도 아주 잘컸다. 그때는 대약진 시기여서 집집이 생활이 아주 궁핍했다. 울 아버지를 꼬시는 사람 있었다.닭 잡아 나누어 먹자는 사람,교실에 있는콩 나누자는것이다.이런 검은 마음을 먹은사람들은 울아버지 호된 질책을 받았다.
울 아버지는 오직 한마음 한뜻이다.전주에서도 주산이 일등인 울 아버지를 대우도 좋은 단위로 회계로 요청했고,개혁개방에 대학교들에서 일본어과를 설치하면서 대학교 교원으로 요청 했지만 몇번이고 거절하고 계속하여 조건이 차하고 환경이 차한 제일 기층에서 자신의 청춘을 불태웠다.
막내인 나는 특별히 아버지의 사랑 독차지 한것같다. 학교에서 술추렴이 끝나 집으로 올때면 꼭 센빙 아니면 뽀즈 한두개 씩 챙겨서 집에 들어오기전에 저를 나오라 손짓하고 제가 다먹는걸 보고 흐뭇해 하며 집안으로 들어갔다.한번은 저한테 바지감이 생겼다.여덟살이 된 나는 그천으로 그날로 바지 해달라고 엄마한테 떼 쎘다.그때 재봉사 어머니 한테는 숱한 일감이 들어와 눈코뜰새 없었다.저녁 퇴근해온 울아버지가 재단을 해서 마선으로 한뜸한뜸 박으면서 그날 저녁으로 저한테 새바지를 해주었다.제가 배구경기를 치를때마다 먼발치에서 흐뭇해 하며 구경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이런 훌륭한 아버지 찌인(基因)을 받아서 인지 高考제도회복 되면서 79년도 거의 삼백여명 필업생 중에서 녀학생으로 제가 한명 우월한 성적으로 대학교에 입학했다.공부도 열심히 했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우리외국어계 녀자배구팀은 전교 일등 류동 홍기를 탔다.지금까지 외국어 학원력사에서 녀자배구 일등 류동 홍기를 타기는처음이다.그뿐이 아니다.당시 五大院校 배구 경기에서도 연변대학 녀학생 팀은 일등을 하여 길림성 대학생 운동경기에 참가하여 3등이란 영예도 따냈다.그때도 나는 역시 주력 공격수였다.
공작에 참가한지 벌써 38년이나 되며 명년에는 곧퇴직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마음에 서운한 점 하나도 없다.아마 아버지가 구중천에서도 굽어 보는것 같고 아버지 혼이 지금도 나의 지휘봉인것 같다.대학교 졸업하고 모중점 고중 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저와 함께 한학년 하던 선생님이 임신 반응으로 불시로 돌아가다 보니 제혼자 네개 반급 교학에 그 선생반의 반주임도 맡았다.지금까지 이렇게 해온 선생 한분도 없다.아버지가 하는걸 보고 내가 하는것이 응당한 일이라 생각했다.가정이 구차한 농촌 학생들은 토일 반급 학생들을 조직하여 모내기를도와주고,여름에는 기음을 매주고 하여 학생들 부담 덜어 주었다.
이런방조를 받았던 농촌학생들은 더 분발해서 열심히 공부한 보람에 좋은 대학에 입학했고 좋은 직장에도 들어갔다....高三高考지도할때는 저가 배워준 반급이 성적이 우수하여 어려번 우수 교원으로 뽑혔고 학부형들과 동사자들의 인정을 받았다. 학부형들이 자식을 데리고 개별보도해 달라는 요청도 많이 받았다.....
그리고 2년에 한번씩 조직하는 전시 중소학교 배구 경기에서도 울학교 녀자배구팀은 三连冠이란 력사기록 돌파했다.
1999년도에 대학교에 전근해왔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성급이상의 간행물에 30여편의 론문을 발표했고 그중 교학, 교연론문 2편은 핵심간행물에 한권의 책도 출판했다. 작년에 전교 督导에서 교학참관에 들어 왔는데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별한 교학인데 마음속으로 부터 우러나온 교학,따뜻한 분위기교학,학생과의 互动이 제일 좋은 교학이란 평판받았다. 아버지 사업 이어받은 딸 근본을 잊지 않고 언제나 어디서나 떳떳 한것 같다...
20여년간 전교 24개 팀 배구,탁구,녀자 축구 경기에서 제가 인솔한 울학원 팀은 번마다 우수한 성적 취득하여 전교 사생들의 높은 평가를 받고 나는 운동 明星으로 되였다. 울학원팀의 경기가 전창의 인기 프로로 되였다. 특히 7인조 녀자 축구가 더욱 세인들의 주목 끌었다.
젊은 운동원으로 이루워진 연변병원팀,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기관팀,후근팀,과학기술대 팀 등등 ..... 순 교학일선의 교원으로 한마음 한뜻으로 이루어진 울 학원팀은 강한 적수팀을 재끼고 第一届 2등, 第二届에는 1등, 第三届에는 2등이라는 좋은 성적 따냈다. 나는 공신이요,핵심이요 밍싱이요 여러번 우수교원 으로도 평성 되였다.
돌이켜 보면 인생은 짧고 해놓은 일 없는것 같다.벌써 륙십고개에 올라서 래년이면 정년퇴직이다. 학생들에게 무얼 가르쳤던가 할때도 많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울아버지가 나에게 준사랑이 그대로 학생들에게 동사자들에게 주위의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해 진것이 아닌가고 생각한다.
나 지금 경기의 전반전이 끝나 하반전에 들어서는 계단에 진입하고 있다. 하반전에도 아버지처럼 초심을 잊지않고 열심히 살련다.
/장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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