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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어머니 오래오래 앉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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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6-02-15 12:17 조회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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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통더위가 이어지던 지난 7월 중순에 우리 형제는 어머니의 생신을 맞아 고향에 계시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한자리에 앉았다. 85년 세월 온갖 풍상을 겪어오신 어머니의 주름 깊은 얼굴, 흰서리가 가득 내린 머리와 지난해보다 좀더 휘여든 등을 보니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았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오랜만에 자식들을 만나 기뻐하는 어머니의 환한 웃음 따라 지난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어머니는 1936년에 경상남도 진주군 문산면에서 태여났고 두어살 쯤에 외할머니 등에 업혀 두만강을 건너왔다. 엄마는 어린 나이에 외할아버지를 잃었어도 강인한 외할머니와 두 외삼촌의 사랑 속에서 별탈없이 잘 자랐다고 한다. 스무살의 꽃나이에 지인의 소개로 키가 훤칠하고 얼굴이 준수한 우리 아버지를 만나 자식들을 줄줄이 낳아 금슬 좋게 살아왔다.


우리 형제들은 부지런한 어머니한테서 어려서부터 성실하고 착하게 그리고 책임감 있게 살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어머니는 늘 큰딸인 나를 데리고 다녔다. 동네 아주머니들과 감자 주으러 나갈 때도, 깨잎 따러 다닐 때도, 쌀 팔러 시장에 갈 때도 나는 늘 어머니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어머니를 보면서 참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돈 한푼이라도 아끼려고 애를 쓰는 모습에서 근면함을, 쌀을 많이 사가는 손님에게 직접 가꾼 채소나 과일을 덤으로 주는 모습에서 후덕함을 본받게 되였다.


1980년대초, 개혁개방의 물결이 휩쓸 무렵에 우리 홍신마을에서는 통일로 벽돌집을 짓게 되였다. 우리는 1982년에 벽돌집에 들게 되였고 이모네와 큰길을 사이 두고 살게 되였다. 당시 아버지와 큰오빠는 대대에서 꾸린 공장에 출근하며 조립식 주택을 만들어 판매했는데 년말이면 수입이 퍼그나 짭짤했다. 어려운 시절을 보내온 어머니는 “빚을 지지 말고 살자”는 신념을 소신껏 지키며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억척스레 일했다.


어느 해는 우리 형제들을 불러놓고 “우리 가마니 부업을 해서 돈을 벌어보자.”고 하면서 웃방에 새끼틀과 가마니틀을 들여놓았다. 큰오빠는 가마니를 짜고 둘째오빠는 새끼를 꼬고 나와 녀동생은 벼짚을 다듬었다. 그 해 겨울방학부터 우리 집은 다른 집보다 부업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아침마다 나와 녀동생은 어머니가 부엌에 쌓아놓은 벼짚을 다듬어서 알맞춤한 크기로 묶었다. 그러면 둘째오빠가 새끼틀로 새끼를 꼬았고 나중에 큰오빠가 가마니틀로 가마니를 짰다. 첫해에 큰오빠는 서툴러서 겨울 동안 몇백장밖에 짜지 못했으나 그 이듬해부터는 천장 넘게 짤 수 있었다.


그 시절 가마니는 농가에서 곡식을 담는 요긴한 물건이였을 뿐만 아니라 홍수가 났을 때 흙이랑 넣어 강뚝을 막기도 했기에 가마니의 수요량이 엄청 많았다. 아버지는 집에 필요한 가마니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팔았다. 겨우내 온 식구가 움직여 부업을 했기에 우리는 꽤 흐뭇한 수입을 거두었고 그로 인해 다른 집보다 좀 여유 있게 살 수 있었다.


어머니가 개척한 ‘치부의 길’은 여기서 끝이 아니였다. 가마니 부업외에도 어머니는 돼지를 여러마리 길러 팔지 않으면 돼지를 잡아 돼지고기를 팔았고 팔다 남은 고기는 움 속에 잘 보관해두었다. 하여 우리는 설날에 돼지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사적은 《흑룡강신문》에 실리기도 하였다.


부업을 하여 목돈이 생기자 어머니는 재봉침을 사서 우리와 이모네 식구들의 옷을 손수 지어주었다.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가 동네에 알려지자 동네사람들도 앞 다투어 찾아와 옷을 지어달라고 청들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공짜로 만들어주다가 후에는 수공비용을 받은 것으로 기억되나 얼마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뜨개질 솜씨 역시 뛰여났다. 어떤 양식이든 한번 보면 금방 배워내는 게 참 신기했다. 이모네 식구들의 뜨개질도 거의 어머니가 맡았다. 특히 한가한 여름철과 겨울철에 우리 집은 뜨개질을 배우러 온 동네 처녀들과 아줌마들로 법석였다. 추운 새벽에 잠에서 깨여보면 불을 켠 채 뜨개질하거나 바느질하는 어머니를 종종 볼 수 있었다.


당시에는 시집 가는 딸에게 손수 코바늘로 뜬 침대보나 방석 등을 혼수용품으로 들려 보내는 게 류행이였다. 나는 결혼 때 어머니가 코바늘로 이쁘게 떠준 침대보와 방석 그리고 앞치마를 지금까지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2019년 9월, 연변에서 열리는 전국애심녀성포럼 워크숍에 갔다가 어머니 뵈러 잠간 고향에 들렸다. 집에 들어서니 어머니가 마련한 가래떡, 찹쌀가루, 무채 등이 한눈에 안겨와 가슴이 찡해났다. 힘든 일은 이젠 그만두라고 그토록 당부했는데도 손에 일거리가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는 어머니는 한가할 때가 없었다.


우리 집 뒤에는 꽤 넓은 터밭이 있다. 해마다 어머니는 거기에 감자, 고추, 가지, 오이, 도마도, 홍당무우, 줄당콩, 호박 등을 가꾸었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거름을 내고 기음을 매면서 하루종일 밭에서 살다싶이 했다. 그 터밭에서 자란 남새들은 오늘도 오빠네 식당을 찾는 손님들의 음식상에 고스란히 오른다. 요즘은 유기농채소를 선호하는 시대라 어머니는 식당의 단골손님들이 돌아갈 때면 여러가지 채소들을 정성껏 챙겨주기도 한다. 어머니 덕에 오빠네 식당은 호황을 이루었고 사과나무, 자두나무, 앵두나무 밑에 모여든 손님들의 밝은 표정도 그 곳에 한때나마 머무르는 멋진 풍경이였다.


어머니의 자식사랑은 멈출 줄 몰랐다. 2000년, 어머니는 회사일로 바쁜 나를 도와 외손녀를 봐주려고 우리가 사는 남방에 오게 되였다. 그 때 우리 집은 7층짜리 아빠트의 맨 꼭대기였는데 꽤 넓은 옥상공간이 있었다. 어머니는 고향에서 가져온 오이, 상추, 고추, 도마도 등 채소의 씨를 ‘옥상터밭’에 심어 싱싱하게 자란 유기농 채소를 밥상에 올렸다.


인품이 넉넉한 어머니는 객지생활에 찌든 조선족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기도 하고 돌아갈 땐 김치도 한가득 들려 보냈다. 우리 집이 다른 아빠트로 이사한 후에는 김밥을 만들어 경비아저씨나 이웃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여 우리 아빠트단지내에서 ‘조선족할머니’ 하면 모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가 이웃들의 찬사를 받게 된 건 비단 이런 일뿐이 아니였다.


당시 우리 옆집에는 2살 손녀를 돌보러 아들네 집에 온 내외간이 살고 있었다. 그 집 아들, 며느리는 장사를 하다보니 집에 있을 때가 적었다. 한번은 이웃집 손녀가 우리 집에서 놀다가 그만 이부자리에 ‘지도’를 그렸는데 무척이나 송구스러워하는 그 애의 할머니를 보면서 어머니는 괜찮다며 웃어 넘기였다. 맛 있는 음식이 있으면 그 집에 내가기도 하고 옆집 할머니가 바쁠 때면 대신 손녀를 봐주기도 했다. 그후로 그 할머니네도 시골집에 다녀올 때면 꼭 당지 특산품을 가져다가 우리 집에 내오군 하였다. “늘 베풀며 살아라.”고 당부하던 어머니의 깊은 뜻을 알 것 같다.


어머니는 수년간 치매를 앓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네 자식을 키우며 자신의 청춘과 사랑을 깡그리 바치면서도 항상 이웃들에게 베풀며 살아왔던 것이다.


설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우리 집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그 옛날, 폭죽소리, 떡메소리 울리고 잔치날처럼 흥성하던 시골마을의 들끓던 정경이 이젠 옛말로 되여버렸건만 어머니는 그래도 고향이 좋단다. 지금도 어머니는 텅 빈 고향마을을 지키며 고혈압에 관절염, 심장병에 시달리면서도 일손만은 여전히 놓지 못한다. 어쩌다 여기 남방 딸집에 놀러 와서도 오래 지내지 못하고 곧 고향으로 돌아가군 한다.


먼 고향에 계시는 사랑하는 우리 엄마

등잔불 켜놓고 뜨개질하던 우리 엄마

바다보다 깊고깊은 따뜻한 마음으로

자식들 고이 키워 시집 장가 보내주셨네

고왔던 우리 엄마 주름진 얼굴은

비바람에 시달린 인생의 훈장이라네

엄마 엄마 자애로운 우리 엄마 만수무강하세요


먼 고향에 계시는 보고 싶은 우리 엄마

재봉침 돌리며 옷 만들던 우리 엄마

하늘보다 높고높은 넘치는 사랑으로

자식들 마음에 믿음을 안겨주셨네

고왔던 우리 엄마 거칠어진 두 손은

풍상고초 겪어오신 인생의 훈장이라네

엄마 엄마 상냥하신 우리 엄마 만수무강하세요


어머니의 85세 생신을 맞으며 내가 쓴 가사 〈우리 엄마〉이다. 어머니께서 건강하게 행복한 만년을 보내기를 바랄 뿐이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사랑, 어머니의 그 사랑을 오래오래 받고 싶고 우리 또한 오래오래 어머니에게 효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어머니와의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들고 싶다.

/손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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