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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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6-02-15 12:26 조회23회 댓글0건본문
지난 7월 18일 오전, 불현듯 연변대학 부속병원 인사처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고 급급히 인사처사무실에 찾아가니 처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정선생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처장은 자그마한 증서를 두 손으로 공손히 넘겨주었다. 펼쳐보니 〈중화인민공화국 퇴직증명서〉였다. 정작 퇴직증명서를 받고 보니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갈마들었다. 나는 증서를 받아들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이 되여 조용한 서재에서 다시금 퇴직증명서를 들여다보노라니 저도 모르게 코마루가 찡해나고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의사생애 36년 동안의 일들이 주마등마냥 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직업의사의 첫걸음
1988년 7월, 나는 우수한 성적으로 5년 동안의 의학공부를 끝마쳤다. 내 학생서류는 연길시인민정부 인사과에 전달되였기에 나는 인사과에 여러번 드나들면서 사업배치를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퍼그나 지났어도 소식이 없었다. 그동안 동창생 3명은 이미 성급병원인 연변의학원 부속병원(현재 연변병원)에 출근하고 있었다. 학습성적이 나보다 낮았던 그들이 먼저 출근하고 있으니 속만 바질바질 탔다. 9월3일, 드디여 인사처의 통지가 날아왔다. 그런데 배치단위가 연길시유리공장 위생소라는 말에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사회는 학교와 완전히 다르구나!’
이는 사회에 갓 발을 들여놓은 내가 받은 첫 사회인생수업이였다.
그 당시 농촌에 계시던 아버지는 내가 졸업하기 두달전 일에 지쳐 68세 나이에 뇌출혈로 세상을 떴고 시름시름 앓는, 때식도 하기 바쁜 어머니 혼자서 서발막대 휘둘러도 거칠 것이 하나 없는 집에서 홀로 살고 계셨다. 나의 급선무는 하루빨리 봉금을 타서 어머니를 부양하는 것이였다.
‘굶은 개 언 똥을 가릴가. 아무데서나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 살길이 나지겠지…’
위생소에는 나까지 합쳐서 의사 3명, 간호사 4명, 약제사 1명이 있었는데 내가 유일한 본과졸업생이였고 또 유일한 조선족이였다.
나는 출근 첫날부터 학창시절때의 불타는 열정으로 열심히 일하였다. 당시 유리공장에는 수백명에 달하는 직공들이 있었는데 작업중 외상을 입는 직공들이 많아 나는 내과병을 보는 한편 간단한 외과수술과 처치도 해야 했다. 지어 녀성직공의 부인과질병도 봐주어야 했다. 나의 림상실력은 극상해야 대학교를 다니면서 생산실습에 참가했을 때 쌓은 기초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는 환자들이 찾아오면 언제나 까근히 병을 보아주었다. 그랬더니 몇달이 지난 후 “금방 배치받아온 정의사가 부인과질병도 잘 치료한다”는 소문이 공장에 퍼지면서 녀성환자들이 더 많이 찾아올 줄이야. 참 웃지도 울지도 못할 에피소드였다…
이듬해 1989년말, 연길시유리공장 년말총결대회가 열렸다. 대회장에는 간부와 직원들로 빼곡이 차있었다. 공회 강주석이 〈1989년도 선진사업일군〉명단을 공포하였다. 명단을 읽기 시작하던 강주석이 잠간 말을 멈추더니 사위를 둘러보며 “위생소 정대식!” 하고 소리높이 웨쳤다. 졸지에 웅성거리던 회장은 물뿌린듯 조용해졌다. 몇초 지났을가, 우뢰와도 같은 박수소리가 대회장에 울려퍼졌다.
심장혈관내과에서
연길시유리공장 위생소에 근무하던 나날에 나
는 석사연구생입시준비를 한시도 늦추지 않았다. 심장혈관내과 석사학위를 따내는 것은 대학시절의 나의 꿈이였다. 그만큼 한평생 의학사업에 종사하고 싶었다. 당시 기초의학전공 졸업생은 졸업시에 석사연구생입학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림상의학전공 졸업생은 2년 이상의 실천경험을 쌓아야 응시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1990년 4월, 실력이 강한 수십명 의사들이 경쟁이 치열한 연변의학원 부속병원(현재 연변병원) 석사연구생입학시험에 뛰여들었다. 시험결과 수십명중 11명이 시험에 합격되였는데 나는 행운스럽게도 1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심장혈관내과 석사연구생과정에 합격하였다.
나는 근 반년간의 석사연구생과정 집중수업을 끝마치고 자신이 편입된 과에 돌아와 실천과 연구를 하게 되였다.
과 사무실에 도착한 첫날, 지도교수는 나를 선생님과 선배님들께 인사시키고 나서 과의 현재 상황을 나에게 소개해주었다. 일주일후, 당직을 안배하는 진주치의사가 문뜩 나를 찾아와서 “래일 저녁부터 단독으로 당직을 서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였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2년 동안 연길시유리공장 위생소에서 근무하였지만 대형병원의 가장 큰 과의 밤당직을 햇내기의사인 나더러 단독으로 서라니. 진주치의사는 나의 속셈을 꿰뚫어보았는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림상의학에서는 실천이 중요하오. 혼자서 중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하오. 빠르면 빠를수록 좋소. 이 난관을 꼭 넘어야 하오.”
이튿날 저녁, 나는 전전긍긍하며 과의 밤당직을 섰다. 가슴이 쿵쿵 뛰였다. 가장 근심되는 것은 밤에 병동환자의 병세가 악화되거나 응급실에 새 환자가 들이닥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노루꼬리 만한 림상지식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당시는 휴대폰이 보급되지 않았을 때여서 모를 것이 있으면 교수님한테 전화를 걸어 물어볼 수도 없었다. 교수님 댁에는 고정전화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귀신소리를 하면 귀신이 온다.(怕什么,来什么。)”고 아니나 다를가 저녁 11시 쯤, 얼굴이 창백하고 땀을 비 오듯 흘리는 환자가 담가에 실려 들어왔다. 나는 가슴이 조여들고 두다리가 와들와들 떨렸다.
‘이래서는 안된다.’
환자를 침대에 눕히고 심전도검사를 해보니 부정맥심상성빈맥(心律失常室上性心动过速)소견을 보이고 있었다. 심장박동수는 매분 180차였다.(정상인은 70차 좌우) 이럴 경우 어떻게 응급대처를 해야 하는지는 대학교때 내과학공부를 하며 진작 배웠건만 정작 현실로 부딪치니 머리속이 하얘졌다. 그래도 머리가 빨리 돌아 인츰 당직실에 들어가 내과학교과서를 뒤졌다. 책에 씌여져있는 대로 5% 포도당액 20ml에 페라팔미(维拉帕米) 10mg을 희석하여 천천히 정맥주사를 하였더니 10여분 지났을가, 환자가 갑자기 “억— 억—” 하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 모습을 보니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여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한참후 환자는 “후—” 하고 긴숨을 내쉬였다. 정신을 차린 환자는 나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매번 병이 발작하여 병원에 오면 치료를 몇시간 받아야 겨우 호전되였는데 오늘처럼 이렇게 빨리 회복되기는 처음입니다. 이제 또 증상이 발작하면 선생님한테 병을 보이겠습니다.”
다시 심전도검사를 해보니 정상심률, 심장박동수는 매분 80차였다. 그러자 탕개가 활 풀리였다. 그후에도 비슷한 병례를 많이 접했다. 때론 함께 당직을 서면서 나이 지긋하고 로련한 간호사한테서 대처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이렇게 실천하고 배우기를 수백번 반복하면서 몇년이 지났다. 그 때에야 비로소 무엇이 림상의학인지를 조금 깨닫게 되였다.
그런데 1995년, 딸애가 세살 나던 해에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그 때까지는 딸애를 장모님이 돌봐주었는데 신장병이 악화되는 바람에 장모님은 더는 딸애를 돌볼 수가 없게 되였다. 그 때 안해는 연길시기차역에서 근무하였는데 사흘이 멀다 하게 밤당직을 서야 했다. 당시 안해는 려객들로 붐비는 연길역에서 딸애를 데리고 당직을 서다가 딸애를 두번이나 잃어버린 적도 있었다. 계속 딸애를 데리고 위험하게 당직을 설 생각이면 일찌감치 퇴직하라고 단위의 령도가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
갈수록 심산이였다. 상론 끝에 나와 안해가 밤당직이 겹치는 날에는 내가 딸애를 데리고 당직을 서기로 하였다.
“여보, 괜찮겠어요? 밤에 구급환자도 많을 텐데.”
안해는 수심어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괜찮소. 우리 딸애는 우리 손으로 기르는 게 맞지. 병동에서는 저녁에 문을 잠그니까 잃어버릴 근심은 없소.”
내 당직날이 되면 딸애는 병원 당직실의 비좁은 침대에 누워 몸을 옹송그리고 잠 들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당직간호사가 당직실문을 급하게 두드렸다.
“선생님, 중환자실(CCU) 환자의 심장박동이 멎었어요!”
나는 신발을 신을 새도 없이 맨발바람으로 중환자실로 달려갔다. 딸애는 와뜰 놀라 깨여나 “아빠, 아빠—” 하고 부르짖으며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인공호흡, 심장압박, 전기제세동(电除颤)등 구급치료를 하여 환자를 구해냈다. 시간이 흘러 환자의 호흡이 고르로워지고 심장이 정상적으로 뛰자 나는 사지가 나른해나서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 때 “아빠—” 하는 나지막한 소리가 귀가에 들려왔다. 그제야 눈물코물범벅이 된 채 내 뒤에 서서 겁에 질려 오돌오돌 떨고 있는 애어린 딸애를 발견했다. 나는 미여지는 마음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내렸다.
‘불쌍한 내 딸아, 부모를 잘 못 만나 고생을 하는구나.’
의료봉사
들판에 푸른 새싹이 돋아나고 따스한 바람이 산들산들 부는 2000년 초봄, 나는 3년간의 외국류학생활을 끝마치고 오래간만에 고향 석문촌에 자리 잡은 룡정시 덕신향양로원을 찾아갔다. 원장인 중학교동창생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원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 양로원에는 로인이 30여명 있는데 40여명으로 늘어난 적도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대부분 로인들은 자식이 멀리 떨어져있고 촌에 의사가 없는 바람에 병이 나면 무등 고생을 겪는다고 했다. 연변병원의 의사가 왔다는 소식이 어느사이에 퍼졌는지 허리 구부정한 로인 여러명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선생님, 저는 머리가 아픕니다.”
“선생님, 저는 변비가 심합니다.”
“선생님, 저는 배가 아파나면서 소화가 잘되지 않습니다. 빨리 치료해주세요.”
……
세상풍파를 겪을 대로 겪은 로인들의 밭고랑 같은 주름이 간 얼굴을 바라보니 10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만 하다가 효도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일찍 세상 뜬 부모님이 생각 나면서 코마루가 찡해나며 눈물이 솟구쳤다.
‘세상의 부모님들은 다 마찬가지구나. 자기의 살점과 피로 어린 새끼를 키우고 빈껍데기로만 남는 어미거미 같구나.’
그 때 나는 양로원 로인들을 보살피리라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장장 24년 동안 나는 의료봉사를 견지하여왔는데 주말과 명절련휴를 리용하여 120여차례에 걸쳐 16여만원의 약을 사서 병치료에 보태라고 보내주었다.
어느 한번, 함께 의료봉사를 갔던 한 연구생이 나한테 물었다.
“선생님은 병원의 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신 와중에 교학, 과학연구까지 하시면서 왜 아무도 시키지 않는 일을 하십니까? 알고보니 2008년 사천성 문천대지진때 의연금 1,000원을 보내셨고 2022년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재해지구에 의연금 10,000원을 보내셨더군요.”
“의사는 병원에 앉아 찾아오는 환자의 병만 보아선 안돼. 우리는 나라와 사회가 양성한 의무일군이야. 우리는 의사이자 사회인으로서 정성껏 환자를 치료하는 동시에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고 나라와 사회에 보답하며 공헌도 해야 해. 우리는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해!”
중병에 든 나날에
2019년 가을, 원부의 지시에 따라 심부전쎈터(心力衰竭中心)가 설립되였다. 심부전쎈터 주임으로 우리 나라 유명한 심장혈관외과전문가 안교수가 임명되였고 부주임으로 내(연변대학 부속병원 심장혈관내과 주임의사)가 임명되였다. 심부전쎈터는 심장혈관 외과와 내과로 결합된, 동북3성에서 두번째로 되는 심부전쎈터였다. 설립된 이튿날부터 본격적으로 심장판막교체수술(心脏瓣膜置换术), 선천적 심장병 페쇄수술(先天性心脏病封堵术), 대동맥류스텐트삽입수술(主动脉夹层覆膜支架植入术)등 수술을 전개하였다.
나의 주요책임은 환자의 심장기능, 혈압, 영양, 전해질 등을 최상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였다. 수십년간 내과의사로 일했던 나는 외과수술에 적응하기 위해 아침이면 연길수상시장에 가서 돼지심장을 사서 해부해보았다. 이는 외과수술 적응에 큰 도움이 되였다.
수술은 성공할 때도 있었지만 간혹 난관에 부딪쳐 실패할 때도 있었다.
2020년 5월 16일 아침, 봄날이건만 날씨는 을씨년스러웠다. 오전 9시, 나는 65세 나는 하강대동맥류(降主动脉夹层)환자를 수술대에 눕히고 수술을 시작했다. 로인은 동맥경화가 심하여 가이드와이어(导丝)가 잘 들어가지 않았다. 안깐힘을 들여 동맥류입구에 스텐트를 넣어서 대동맥조영술(动脉造影术)을 해보니 오른쪽 신장동맥이 막혀있었다. 그런데 스텐트를 우로 당기는 순간 스텐트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내버려두다간 급성신부전(急性肾衰竭)이 와서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치료진 성원들의 긴장한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내돋았다.
나는 급히 경험이 풍부한 복부외과와 비뇨기외과 교수를 청하였다. 15분도 안되여 두분이 수술실에 도착했다. 그 때 시계는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두 교수님은 환자의 복부를 가르고 신장동맥을 박리한 다음 막힌 신장동맥을 뚫고 스텐트를 넣었다. 복부봉합이 끝나니 저녁 10시가 다되였다.
옹근 13시간의 수술이 끝나자 주임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도착하니 12시가 다되였다. 그 때까지 자지 않고 있었던 안해는 나의 가방을 받은 후 차물 한 고뿌를 따라주었다.
“친척분들이 저녁 8시까지 당신을 기다리다가 갔습니다.”
“친척이라니?”
“오늘은 당신의 56돐 생신이지 않습니까?”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침에 출근할 때 “오늘은 당신의 생신이니 저녁에 일찍 귀가하세요.”라던 안해의 신신당부를 깜박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튿날에도 나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피로를 무릅쓰고 제시간에 출근했다.
2021년 4월초, 주임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신체상황이 좋지 않구만. 얼굴이 새까맣소. 빨리 건강검진을 해보오.”
그렇잖아도 최근 들어 오른쪽 복부가 띠끔띠끔 아파나고 소화가 잘되지 않았다. 워낙 30여년의 만성 간병으로 매일 약을 복용하고 있던 터였다. 무엇인가 짚이는 데가 있는지라 4월 15일에 복부CT영상검사를 받아보았다. 검사를 마치고 영상대에서 내려오는데 영상을 지켜보던 CT검진실의 현주임이 다가와 말했다.
“선생님, 자기공명(MRI)검사를 받아봐야겠습니다.”
그의 얼굴은 굳어져있었다.
‘내가 끝내 몹쓸병에 걸렸구나. 간암이구나.’
나는 인츰 MRl촬영실로 옮겨졌다. 기계는 한사람이 겨우 누울 정도의 크기였는데 턴넬 같은 기계 안에 누우니 천정에 코가 닿일 것만 같았다. 눈을 뜨면 관 속에 누워있는 것처럼 공포감이 밀려오는 바람에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생각하니 외동딸보다 안해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내가 죽으면 나약하고 다병한 몸으로 여생을 외롭게, 힘들게 살아갈 안해의 모습을 떠올리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이튿날, 교수진의 회진결과 간경화, 원발성간암말기란 진단이 내려졌다. 나는 큰 놀라움도, 큰 슬픔도 없이 묵묵히 결과를 받아들였다. 원부의 령도가 찾아와 안위하면서 국내의 유명한 종양병원에 가서 병을 보일 것을 권유했지만 나는 단마디로 거절했다.
“우리 병원은 력사가 유구하고 제가 청춘을 바쳐 일해온 곳이므로 우리 병원 종양치료진의 치료를 받겠습니다.”
5월 6일, 나는 과의 아침교대를 마치고 나서 선생님과 후배들, 학생들의 배웅을 받으며 수술실에 들어갔다. 환자를 수술해주던 수술대에서 내가 환자로 되여 수술을 받으니 마음이 서글퍼났다.
‘의사도 사람인지라 수십년간 과부하로 일하니 병이 날 수밖에 없지.’
국부마취만 하기에 참기 어려울 정도의 통증이 밀려왔다. 사려문 이발이 부서질 지경이였다. 입아귀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홀연 내가 이 수술대에서 치료했던 환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분들도 공포에 떨며 극심한 아픔을 참으며 몸부림 쳤으리라. 그 때 친인처럼 따뜻하게 위안해주지 못했던 것이 너무 후회되면서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5월부터 10월까지 근 반년 사이에 나는 총 다섯번의 수술을 받았다. 매번의 수술은 참기 어려운 생사고비였지만 다시 일어나 일터에서 환자를 위해 복무할 신념으로 용케도 버텨냈다.
인생길을 걷다 보면 누구든 넘어질 때가 있다. 넘어질 때마다 먼지를 툭툭 털고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이 요긴하다.
입원치료를 받는 틈을 타서 의학책을 보려고 했으나 의학책이 워낙 크고 두꺼운지라 누워서 볼 수가 없었다.
‘무엇을 한담?’
궁리하던 중 피뜩 생각 나는 바가 있었다.
‘그래. 다사다난했던 지난 30여년간의 의사의 희로애락을 쓰자. 그리고 고중 졸업후 수십년간 담을 쌓았던 조선어로 글을 써보자.’
생각은 좋았으나 정작 쓰자니 눈앞이 캄캄해났다. 나는 핸드폰을 잘 다루는 외조카를 불러 조선어 타자를 배웠다. 외조카가 돌아간 후 나는 병상에 비스듬히 기대여 앉아 핸드폰을 들고 한 글자 한 글자 타자해내려갔다.
“나는 왕청 떡박골에서 10 남매의 막내로 태여나 지금 연변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고 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마음이 벅차올랐고 또 병원신세를 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니 설음이 밀려들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내렸다.
그후 근 한달동안 낑낑 갑자르며 〈부모님의 바람〉이란 짤막한 글을 써냈다. 지금 보아도 아주 서툰 글이였다.
부모님의 바람
따사로운 아침해살
창문으로 서서히 비껴들어온다
피곤에 싸인 사나이의 거친 얼굴 쓰다듬어준다
분명 살아있는 거지
나의 착한 막둥이야
너도 인젠 60에 가까워오는구나
하지만 어머니의 눈에는 네가 항상 어린애야
우리가 너의 곁을 떠난 지도 어언간 30여년이 되는구나
그동안 어머니와 아버지는 하늘 저 멀리에서 너를 지켜보고 있었어
너는 한 안해의 남편으로서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백성들의 의사로서
말 못할 온갖 고생을 하면서
이날이때까지 버티여왔구나
남들이 다 잠에 곯아떨어진 깊은 밤에도
너는 항상 위급한 환자를 구하느라
온몸이 땀투성이 되여 헤매는 것을 보노라니
부모 된 우리 가슴 칼로 에이는듯 아프구나
더우기 수십년 동안 나약한 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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