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길에서 > 삶의 이야기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한민족연합회(韩民族联合会)


KCNTV한중방송(채널:303번)

2026 년 2 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삶의 이야기

배움의 길에서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6-02-15 12:35 조회10회 댓글0건

본문

일전에 외지에 있는 딸집에 갔다가 소힉교 일학년생인 외손녀가 집에서 컴푸터로 숙제를 하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우월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애를 보니 나의 눈앞에는 저도 모르게 우리 세대들의 그 때 그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1966년 중학교에 입학한 나는 1970년 2월 지식청년으로 농촌에 갔다, 집체호에 가서 십년 있는 동안 공부하려 해도 교과서도 없고 선생님도 없는지라 그저 쯤쯤이 사전이나 찾아보며 잡지, 소설이나 읽는 정도였다. 1977년 대학시험제도가 회복되자 12월 10일, 공사마을인 위자구에가 시험장에 들어갔으나 까막눈인 우리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였다. 1980년 4월, 농촌에 간지 꼭 10년만에 성시에 돌아와 건축부문에 배치받았다. 앞으로 긴 세월 힘도 없고 지식도 없는 내가 이 막로동판에서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날이 갈수록 문화지식에 대한 갈망은 짙어만 갔다.


1982년 겨울, 다행히 단위에서 건축일을 못 하는 계절을 리용하여 학습반을 열고 초중수학과 초중조선어문을 학습시켰다. 나는 목마른 사람이 감로수를 만난 것처럼 열심히 공부하여 시험에 수학백점이라는 성적을 따냈다. 그후 연길시에서는 종업원 야간고중을 꾸렸다. 시간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저녁 6시부터 8시50분까지 였다. 나는 매일 5시넘어 퇴근하고 밥도 못 먹고 교실로 갔다가 9시 넘어 집에 와서는 11시까지 숙제와 예습을하고 부업하는 언니를 도와 와이샤츠 단추구멍을 틀며 밤 한시가 넘어야 자리에 눕군했다. 비록 이처럼 다망했지만 마음만은 충실하고 즐거웠다. 우리가 학교에서 못 배운 기초지식을 이렇게 배우지 않으면 영원히 못 배울 것인데 왜 기쁘지 않겠는가? 특히 다원다차방정식, 삼각함수, 수렬 등을 배울 때의 그 격동된 심정은 어디에다 비길수 없었다. 1985년 7월18일 고중공부를 한 단계 마치고 고중졸업증을 탔다.


고중공부가 끝나고 인차 함수대학의 토목과학습을 시작했다. 학비 내고 교재 받고 낮에 출근해 현장에서 보고 배우고 저녁에는 교과서를 읽고 하면서… 그러나1987년초, 둘째 언니가 위암으로 입원하자 칠개월동안 병시중하다나니  시험도 못 치고 포기하고 말았다. 그후 또 한번 기회, 종업원직공대학시험이 있었으니 락방하고 또 한번의 좌절을 겪었다. 이렇게 몇번의 좌절을 거듭하며 나는 공부와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또 한번의 기회가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연길시진수학원에서 길림장춘건축학원과 손잡고 학생들을 모집한 것이다. 생산을 탈리하지 않고 겨울에 중점만 강의받고 자신이 독학하며 배우는 것이다. 이 공부는 시작할때 시험을 안 치고 해마다 4월과 10월에 두번 시험을 치며 마지막 론문까지 합격하면 졸업장을 받을수 있었다.


나는 다시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첫째, 본인이 대학문앞에 가보지 못 한 것이 평생의 한이고 둘째, 건축부문에서 일하려면 어쨌던 이 학력관을 넘어야 했고 셋째는 자식들에게 떴뗫한 부모가 되고 싶어서였다. 하여 내 나이 39살이던 1992년11월1일부터 학습을 시작하였다. 강의속도는 매우 빨랐다. 고등수학 2달, 그외 중요과목은 한달, 일반과목은 반달 혹은 일주일이였다. 나에게는 크나큰 난관이였다. 어제 금방 풀었던 문제도 오늘 풀면 모르겠고 한 문제 풀려면 초중때 공식부터 다시 외워야 했으며 고등수학, 건축구조의 힘의 분석, 건축재료의 화학 반응 등 모두가 혼심을 다해 배우지 않으면 안 되였다. 너무도 힘들때는 포기를 생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때마다 어렵게 찾온 학습 기회를 절대 놓칠수가 없었다.


당시 우리집에는 딸 둘과 친정 어머니, 남편이 계셨는데 온 식구가 나에게 지지를 주었다. 특히 봄, 가을 두번씩 있는 시험시기는 새벽 두시에 자리에 눕는 나를 위하여 아침밥은 남편이 맡았다. 온집 식구가 함께 공부한 셈이다. 고등수학을 배울때 네돐이 된 둘째딸을 어디에 맡길데가 없어 상과할 때 제일 뒤자리에 앉혀 놓았다. 그런데 돌아와 제 아버지보고 하는 말이 가관이였다.


“아버지, 어머니 배우는 것이 다 내가 아는 것입니다.”

“그래? 그럼 어떤걸 배우더니?”

“다1, 2, 3, 4와 가감을 배웁데다.”


온 집안이 웃음판이였다. 공부를 시작한 이듬해 가을 네 과목시험 쳤는데 몽땅 락제였다. 집에 돌아와 문고리를 쥐였다 놓았다하면서 문을 열지 못햇다.

"온 집식구 정성이 들었는데 어떻게 말하지?"


기척을 듣고 남편이 달려나와 나의 기색을 보고 알아차리고 “금년에 못 넘으면 명년에 다시 넘지, 그렇게 어렵지 않으면 누구나 다 넘자고 하지”하며 오히려 나를 위로하였다. 우리 온 집식구들의 지원 덕분으로 마침내 삼년석달에 과정을 완수하여 졸업장을 타게 되였다. 졸업장을 받는 순간 기쁘기도 하였지만 너무나도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이 작은 종이 한장을 위해 그 숱한 고생을 했는가? 도대체 이 종이 한장의 가치가 뭐지? 그러나 일생을 살아오며 그 종이 한장의 가치가 끝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나의 일생에 매우 중요한 한 장이였고 우리 부모의 희망이였으며 내 자신의 자존심이였고 내 자식 앞에서의 떳떳함이였다.


시험성적이 모두 선을 넘은후 나의 사업은 상승선을 그었다. 공정사직함도 가졌고 관리강위에 배치받았다. 단위에서는 공부를 시작하기 전 약속과는 달리 학비도 결제해 주고 직장도 고정되는 반전을 가져왔으며 고희가 넘는 지금까지도 출근하여 남은 여생을 빛내가고 있다.


력사여! 잊지 마시라! 한시기 그토록 학습을 갈망하면서도 못 배운 세대가 있었고 그들이 바로 지식이 없고 힘이 없지만 완강한 의력으로 가정을 지키고 자식들의 앞날을 개척하고 나라를 발전시킨 자랑스런 우리 세대들이였다는 것을!

/김월일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7,602
어제
25,343
최대
26,971
전체
1,748,946
한민족연합회
회사소개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Copyright © hmzkorean.korean.net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