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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우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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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6-03-04 12:43 조회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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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는 해주최씨 아버지와 밀양박씨 어머니 슬하에서 태여난 삼남매 중 맏딸이였다. 최혜자 라고 부르는 이쁘고 얌전하고 지적인 조선족 여성이였다. 옛말에 뭐 최씨 여자와 박씨 여자가 사무럽다고   뭐라뭐라 하던데 울 엄마한테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이다. 


엄마는 어려서부터 부모 말씀 고분고분 잘 듣는 착한 딸이였다. 근데 호랑이 같은 외할아버지는 유독 울 엄마한테만 무섭게 굴었단다.  학교 갈 때에도 교복을 못 입게 해서 밖에 숨겨 뒀다가 입고 갔다. 울 엄마가 룡정 은진여고 재학 중인데 할아버지가 뚝 떼여서 시집 보냈다. 그때로부터 울엄마의 인생에 어두운 장막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저의 아버지는 충주 최씨네 아들 삼형제중 둘째였다.  해방전에 일본에 가서 류학생활 하고 돌어와서 화룡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뛰여난 미남 선생님이였다. 울 할아버지네는 지금의 화룡동성에서 살고 계셨다. 울엄마가 시집가고 인차 해방을 맞이했다. 그곳 학교에서 엄마더러 나와서 선생질 하라고 했는데 고태이신 할아버지 반대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때에 교편을 잡았더면 후에 연길에 어느 학교 교장쯤은 됐을텐데. 그러나 그때 엄마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 여자이기 때문에. 아내이기 때문에. 며느리이기 때문에. 그것이 엄마 인생이 꼬이는 첫 발이였다.


해방된 이듬해에 내가 태여 났고 엄마는 화룡에 가서 아버지와 험께 세간살이를 시작하게 되였다. 화룡 중학교 교원 사택에서 엄마는 아버지의 내조에 온 힘을 다했다 후에 들을라니 해방 직후에는 교원들의 월급이 없이 좁쌀이랑 줬다고 했다.  근데 엄마는 어떻게 구했는지 아버지게 닭고음이랑 해서 올렸다. 다섯살 어린 나이에 희미한 기억이 있는것 같다. 그땐 이미 내 동생도 태여 났다. 엄마가 닭고기를 내 손에 쥐어 주어도 나는 "아버지가 잡숫고 돈 많이 벌어 와야 동생 사탕 사주지."라고 어물죽하게 말하며 먹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해방 직전에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렵게 중학교를 다녔으나 그 지식을 가정 주부로 썩힐 수 밖에 없었다.

저 하늘에 검은 구름은 울 엄마게로 몰려왔다.


어느날 오후 한 학생이 헐레 벌떡 달려 와서 우리집 창문에 대고 소리 질렀다. "사모님 최선생님이 쓰러졌습니다." 엄마는 너무 놀라서 내동생을 둘쳐 없고 내 손을 끌고 병원으로 달려 갔다. 맙소사, 아버지는 병원 침대에 꼼짝 않고 누워 있고 의사와 호사들이 분주히 달아 다녔다.  엄마는 그자리에 굳어 버렸다.  호사가 아버지게 주사 한대를 쑥 지르자 아버지가 벌떡 일어아 앉더니 쿵 하고 다시 쓰러졌다. 그리고 그 맵시로 영영 떠나가시고 말았다.


하늘 땅이 빙빙 돈다고들 말하는데 엄마에게는 하늘이 아예 무너져서 완전 새까만 세상이 되였다.  다섯살짜리와 두살짜리 두 딸을 둔 스믈일곱살 색시에게는 있을수 없는 일이였으니 말이다. 엄마가 통곡하니 나도 같이 울었을 뿐 이게 도대체 어떤 일인지는 몰랐었다. 


아버지 장례식을 학교 뒤산 언덕에서 치뤘다. 화룡중학 전체 사생들이 줄지어 올라 가서 빙 둘러 섰고 선생님 한분이 추도사를 읽었다.  숨소리도 없는듯 조용한 가운데 다섯살짜리 내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웨쳤다 . "엄마 저 과자를 집에서 봤소."  제상 위에 놓인 노랑색 분홍색으로된 부채살 같이 생긴 커다란 과자를 집에서 봤던게 생각 났던 모양이다.  그러자 장례삭장이 울음바다가 됐다. 저런 철부지 둘이나 두고 간 아버지 사망이 전체 사생들의 더 큰 비통을 자아냈던거다. 내가 성인이 된후 연길에서 아버지 제자분들 만나면 엄마가 나를 큰애라고 소개하면 그분들이 꼭 이 말을 하군 했다.  삼십여년이 지났어도 그때 그일이 얼마나 기막혔으면 이럴가. 


화룡에서 5년 세월은 엄마의 인생에 앞이 안 보이는 캄캄 세상을 만들어 주었다. 엄마는 더이상 화룡에서 살 수 없어서 쬐꼬만 딸 둘을 업고 안고 룡정에 있는 엄마네 이모 집에서 찌살이를 시작했다. 온기도 없는 비좁은 한윗방에서 애 둘 데리고 삭뜨개질 해서 생계를 유지하려 안깐힘을 다 쓰셨다.


그러던 어느날 다섯살내기 내가 눈이 아파서 햇빛이 비추기 시작하면 눈을 뜨지 못하고 얼굴을 틀어 밖고 울기만 했다. 엄마는 수소문 끝에 덕신향 허무이라는 곳에 지자 성을 가진 의사가 있는데 눈병을 잘 고친다는걸 알게 되였다. 근데 애 둘 데리고 생면 부지인 곳을 어떻게 찾아 간단 말인가. 그땐 버스커녕 소수레도 다니는게 없었다. 엄마는 동성에 있는 시어머니한테 애 하나를 업고 같이 가자고 청을 들었는데 그만 거절 당했단다. 아버지가 없으니 우리를 품지 않으려는 속심이였을거다.


엄마는 내 동생을 업고 나를 안고 룡정에서 덕신 골안을 향해 길을 물으며 가고 또 갔다. 울엄마는 시가지에서 나서 자란 국수집의 고운 규수다. 농촌 길은 처음이다.  길가에 앉아서 작은 애를 안고 젖을 먹이는데 애 뒤목에 붉은 점들이 돋은걸 발견했다. 엄마는 그것이 뭔지 몰랐다.        

           

우리는 힘겹게 걷고 걸어서 끝내 의사 집 동네에 도착했다. 산골 마을 집집마다 굴뚝에 저녁밥 짓는 하얀 연기가 하늘거렸는데 마치 불쌍한 우리 세 모녀를 환영이나 하는것 같았다. 의사 집은 륙간 초가집이였는데 식솔이 많았던 걸로 기억된다. 의사는 내눈에 새하얀 가루를 넣어 주었다. 나는 아프다고 발광하며 울다가 잠들었다. 의사가 내 동생을 보더니 홍진이란다. 썩 먼저 수두를 앓은적이 있었는데 경험없은 엄마는 그게 홍진인가 했었다. 어떻하니. 엄마에겐 또 무서운 시련이 닥쳐 오련다. 홍진하는 애를 업고 이렇게 먼곳까지 왔으니 어찌할고. 의사집에 사람도 많고 미안해서 이튿날에 룡정으로 돌아 가리라 마음 먹었다. 돈이 없어서 엄마가 시집 갈때 가지고 갔던 저고리 두개를 의사 앞에 내 놓았다. 의사는 불쌍한 애들인데 이걸 못 받겠다고 하면서 도리여 동복저고리(솜옷)를 씌워 주었다. 그때는 솜옷이 있는 사람이 희소했었다.


엄마는 또 애 둘을 업고 안고 그 먼 산길을 걸어서 룡정 거처에 돌아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믈일곱살 엄마가 얼마나 힘들고 무서웠겠는지. 이 글줄을 넘기면서 가슴이 터지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날 밤에 내 동생은 계속 열이 났다. 엄마가 젖을 물리고 끼고 누웠으나 애가 엄마를 타고 넘어갔다 왔다 하며 진정을 못 했다.  그래도 돈이 없으니 병원도 못 갔다.   후에 엄마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날 밤에 돼지 똥을 양철판에 구워서 물 해서 먹였단다. 그날 밤으로 세살 난 내 동생은 엄마 품을 떠나고 말았다.   아이고 세상은 왜 이리도 무심할가. 아버지를 금방 잃은 불쌍한 것을 왜 데려 가는가. 아이구... 결국은 나 때문에 동생이 죽었다. 그때는 다섯살 난 내가 알수 없었으나 세상을 알면서부터 지금까지 한평생을 죄 짓고 사는 기분이다.  내 동생는 나와는 다르게 새말간 얼굴에 새까만 눈 정말 곱게 생겼다. 그래서 엄마가 어떤때는 미운게 살고 고운게 죽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나는 엄마의 인생에 영원히 가슴에 묻고 갈 상처를 심어 주었다. 세살짜리 딸애를 가슴에서 뚝 때여 룡정 영국더기라는데다 묻어 놓고 엄마는 어떻게 살수 있겠는가. 어린 피덩이와 같이 가겠다고 오열을 하는데 커다란 눈 맬똥맬똥 쳐다보는 나때문에 돌아 섰단다. 엄마는 룡정에 더는 있을 수 없어서 또 나를 데리고 연길로 왔다. 


조선 화령에서 국수집을 경영하시던 외갓집에서 조선 전쟁이 터지자 연길로 피난 왔던것이다. 외할아버지 우격으로 시집 갔던 엄마는 5년만에 남편을 잃고 젓먹이 딸애를 잃고 내 손를 끌고 본갓집에 얹혀 살러 왔다.  그런 팔자로 다시 부모 집에 들어서는 엄마의 마음은 이루다 형용할수 없었다.  그러나 호랑이 외할아버지는 우리를 미워서 랭대하였다. 거기다가 또 우리 이모도 군인 남편이 참전하여 어디에 정착할 수 없어서 나와 동갑내기 아들을 데리고 들어 와 있었다. 할아버지는 출가지외인인 두 딸이 혹까지 하나씩 달고 들어 오니 내 놓고 미워했다. 


외갓집에 온지 얼마 안되는데 내 눈병이 또 도지기 시작했다. 누구의 처방인지 뜸을 뜨면 된다고 했었다. 그래서 친척 몇분이 달려 들어 애비 잃고 불쌍한 어린것을 붙들고 눈물 흘리면서 뜸을 떴다. 지금도 허물이 남아서 아는데 목 뒤 량쪽 풍지혈과 두 엄지 손가락 첫 마디에 뜸을 떴다. 나는 따갑다고 소리 질렀고 엄마는 가슴이 터졌을 거다. 하여튼 나는 엄마에게 고통을 주는 애물단지였다.


배운 지식과 재능을 썩혀 버리는 엄마의 속은 어떠했겠는지 어린 나는 알수가 없었다. 이렇게 삼년이 지났다. 애 딸린 엄마가 혼자서는 살수 없다고 생각했던지 엄마는 재혼을 결심했다. 지식인이였던 엄마는 같은 지식인을 선호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모 대학교 선생님을 소개 받았는데 그분이 나를 못 키우겠다고해서 포기했단다. 그런데 후에 연변농구공장 기술원인 분이 나를 키워 주겠다고해서 그분과 재혼하게 되였다. 내가 또 엄마의 인생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였다. 엄마는 일곱살짜리 나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엄마이기 때문에.  


새 아버지는 나를 친딸처럼 잘 키워주셨다. 월급도 꽤 많이 받았고 씀씀이도 헤펐다. 나한테 항상 푸짐히 사 주었다. 나를 사범학교까지 공부시켜서 교원으로 만들어 주신 아버지시다. 그래서 내가 첫 월급 31원 50전을 받고서 10원을 하숙집에 바치고 20원을 아버지께 드렸다. 그때 마침 아버지가 자전거를 월보로 샀었다. 아버지께서 돈을 받아 쥐고 너무 반가워서 2백원보다 더 크다면서 기뻐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근데 새아버지는 술을 너무도 반가워 해서 매일 취해서 집에 들어 오셨다. 온 밤 새워 가며 노래만 불렀다. “목단꽃을 겁푸란사라무라 찻집에~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엄마는 옆집에 미안해서 안절부절 못했다. 그때 울집은 연길시 신흥가 5조에 있었는데 주위기관을 사택으로 개조한 집이라서 한 용마루에 다섯세대가 살았는데 세집의 천정위가 통칸이다. 그래서 첫집에서 방구 뀌면 세번째 집까지 들린다고들 했다. 그러니 아버지가 취하면 그날은 세집이 모두 잘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농구공장 기술원인데 자기는 쇠붙이로만 뭐 만들지 다른거는 모른다 하시면서 집안 일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다. 집 앞에 창고가 무너졌는데 엄마는 하는수 없이 동네 엄마 두명과 함께 겨우겨우 수리했었다.


내가 연길시중앙소학교 3학년 다닐 때다. 초가을즘인것 같다. 하루는 학교 갔다 왔는데 숫한 사람들이 달아 다니며 불 끄고 있었다. 그게 봐로 우리집에 불이 난거였다. 겨울날 준비를 하느라고 엄마가 새하얗게 회칠을 했었고 새노란 장판지를 붙힌 방바닥이 너무 이뻐서 지나가고 오는 사람들이 들여다 보고 찬사를 보냈었다. 그런 집이 새까맣게 타고 물 바다로 변했다. 집안에 기물이 몽땅 타버려서 숟가락 하나 건지지 못했다. 네가구가 붙어 사는 건물인데 몽땅 다 타버렸다. 중간집 철부지 애들 둘이 있었는데 불장난한게 이불에 불이 달려서 네집을 몽땅 태웠었다. 우리 세 식구는 그저 입은 옷 밖에 없이 허망에 나앉게 되였다.


다행히 마음씨 고운 앞집에서 들어와 같이 살자고 해서 찌살이를 하게 되였다. 이번에는 엄마에게 닥친 진짜 불벼락이였다. 엄마는 날마다 불탄 집에 들어 가서 재를 걷워 내고 새까맣게 탄 벽을 칼로 긁어냈다. 소방차의 물 대포로 물 바다가 된 온돌을 다 거둬 내고 구둘 돌을 다시 놓고 불을 때서 말리우고 회칠도 다시 하셨다. 손이 다 터지면서 집수리를 끝마치셨다. 원래 집안 일에 손을 대지 않는 아버지는 출근하니깐 손을 바랄수도 없었다. 엄마는 또 갑자기 들이 닥친 재앙에 몸과 마음 모두가 만신창이 되였겠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불탄 집을 손질하여 겨울에는 제집에 다시 들어가 살수있게 만들었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울 엄마를 놓고 하는 말 같았다.


내가 연길시3중 2학년때다. 나의 새 아버지한테는 친자식이 없었다. 엄마는 날 데리고 간게 미안해서 아버지 지식을 만들어 주려고 남의 자식을 안아다 키울 결심을 했다. 마침 연길에 있는 리씨네 집에 여섯번째 아들이 늦둥이로 태여 났는데 그엄마가 심장병이 심해서 키울수 없어서 입양 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엄마는 태여난지 4개월 밖에 안되는 60년생 남자애를 안아 왔다. 애가 바로 먹지 못해서 보기 구차할 정도로 약했다. 그래서 내가 무슨 애기 허벅지가 손가락 만하다고 말했다 .때마침 중국의 3년 자연재해 시기여서 돈 주고도 우유랑 사탕가루랑 살수없었다. 신흥가두에서 우리 정황을 다 아니깐 그나마 시커먼 쿠바탕이라도 표를 얻어서 살수 있었다. 우유는 더구나 살수 없었다.


우리 동네는 주덕해, 요흔, 전인영 등 주위 령도들이 사시는 동네였다. 주 종축장에서 매일 우유를 싣고 와서 배달했다. 그래서 울 엄마가 그냥 울면서 사정사정해서 한달분씩 우유표를 얻어서 먹였다. 한번은 “6.1절”인데 새달 우유를 사지 못해서 애가 굶게 되였다. 엄마는 내동생을 업고 철남 남산에 있는 종축장까지 갈어가서(그때는 버스가 없었다.) 또 울면서 사정해서 한달분 표를 얻어왔다. 지금은 벼라별 곤로가 다 있지만 60년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 학습장을 뜯어서 돌돌 말아서 준비해 놓았다가 불을 붙혀서 우유를 끓였다. 재철이를 손에 쥐고 끓여서 엄마의 열손가락은 뜨거운 재철에 데여서 지문이 다 없어졌다.


엄마는 그때 연길서시장부근에 있는 공상은행에 출근했다. 출근 할때에 애를 업고 보온병 두개에 우유병에 뭐 숱해 들고 탁아소에 가야했다. 근데 애가 워낙 약하기에 자꾸 병원에 입원 하게 됐다. 그렇게 되자 엄마는 출근하기가 곤난했다. 별로 크게 고민할 새도 없이 엄마는 그 좋은 직장을 그만 두게 되였다 아들을 키우는게 첫째니깐.  그때는 퇴직 제도가 지금과 달라서 울 엄마는 퇴직 공자가 없게 되였다. 내가 지금 생각해도 젤 원통한게 이 일이다. 해방전 지식인이 그 좋은 공작터도 있었는데 퇴직금이 없는 신세로 살게 됐으니. 엄마의 속은 더 어떠했겠는가.  그래도 엄마는 동생이 커가는걸 보면서 한번도 내색을 내지 않았다. 엄마는 모든 정성을 아들에게 쏟아 부었다. 당연히 나는 찬밥 신세였다. 온 동네에서 나는 아무개 누나로 불리웠고 내 이름은 없었다.


엄마의 이런 눈물겨운 고생이 있어서 내 동생은 건강하게 자랐다. 엄마는 살림에 보태려고 연길 식품공장에 출근해서 사탕 싸는 림시공 일을 했다. 어느덧 내동생이 고중생이 되여서 대학입시 준비를 하게 되였다. 그런데 검은 구름은 또 엄마한테로 몰아 왔다. 농구공장에 출근했던 아버지가 쓰러졌단다. 연변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아버지는 이미 숨을 거두었었다. 엄마와 동갑인 아버지는 59세로 세상을 마감했다. 일곱살때 아버지를 만나서 귀여움을 받으며 잘 자랐고 연변한어사범을 마치고 룡정실헙소학교에 배치받아 교편을 잡을수 있게한 고마운 아버지다. 엄마는 또 한번 남편을 잃은 고통을 겪게 되였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동생이 다음달에 담방 대학시험이라서 크게 슬퍼 할사이도 없었을것 같았다.


내 동생은 아버지 사망으로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대학 록취선에 어쩜 1점이 모자라서 락방 되였다. 이 모든게 엄마의 운명이 아닐가, 무슨 신의 작용일까. 엄마는 너무도 원통해서 나더러 초생반공실에 가서 사정해 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거기 찾아 가서 사정했더니 그분들이 말하는게 1점이 모자라는학생이 길림성에 5백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래서 동생은 길림공업학교에 가게 됐다. 애지중지 보배둥이를 길림에 보내고 엄마는 아들이 학교서 이밥 못먹는다고 쌀독에 쌀 한알없이 옥수수죽만 해 드셨다. 아들이 학교서 춥게 잔다고 집에서 불도 않 때고 찬 구들에서 주무쉬군했다. 


그때는 사탕 싸는 림시 일도 끝나서 수입이란 일전도 없었다. 집앞에 창고를 한달에 30원씩 세돈 받아 모았다. 나도 그때 공자가 42원 밖에 안되니 엄마를 도울수도 없었다. 엄마는 지인의 소개로 하남에 있는 교통국 청소부로 들어 갔다. 신문 잡지가 수십가지나 되는데 엄마는 조문 한어 일어를 다 아니깐 척척 갈라서 각 사무실에 배달해서 그 단위에서 만족했다. 근데 후에 들은 소리인데 엄마는 그때 화장실 청소를 할때 젤 자존심 상하더라고 했다.  몇년전에 연길5중에서 일어교원으로 초빙하려 했으나 내동생을 키울 때는 불가능한 일이였다. 어쩜 울 엄마 인생는 꽁꽁 탈아 놓은 새끼줄처럼 탈기기만 하는지 정말 눈물도 피눈물이 났다.


세인을 감동 시키는 엄마의 사랑으로 엄마의 보배 아들 내 동생은 학교를 졸업하고 연길방직공장에 배치 받아 후에는 설비과 과장을 맡았다.  그리고 연길시병원에서 호사로 일하는 처녀를 만나서 결혼하게 되였다. 엄마는 세상을 다 얻은 기쁨이였다.  그런데 마음 한가운데 걱정거리도 있었다. 며느리가 혹시 후에라도 입양한 아들인걸 안다면 문제 생기지 않을가.  엄마는 평생 이 걱정을 가슴에 안고 살았다.  혹시 아들을 누가 찾아 가면 어쩌나 해서 말이다. 그래서 소학교부터 고중 졸업할 때까지 반주임 선생님을 바꿀 때마다 헉교에 찾아가서 우리 아들을 누가 찾아 오면 절대 보이지 말라고 신신 당부 했었다. 평생 가슴 조이던 일이지만 며느리 될 사람한테는 알려야 한다고 큰 결정 하셨던거다. 며느리 될 처녀가 이 말을 듣고서 "그렇다면 어머니를 더 잘 모시겠습니다. "라고 말해서 엄마는 이루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목구멍이 꽉 메였고 셋이 안고 울었다.


내 동생네는 결혼 이듬해에 딸애를 낳았다.  어찌나 기쁜지 이제부터 엄마의 세상 같았다.  나는 여지껏 엄마의 웃음 띤 얼굴을 처음 보는것 같았다.  손녀가 태여난 날 부터 엄마가 데리고 잤다.  젖만 먹여다가는 엄마가 도맡아 키웠다. 손녀가 커가는 맛에 여지껏 꼬인 엄마의 인생에 파란등이 켜지는 기분이였다. 


엄마는 몇십년을 연길에서 살면서도 한번도 공원 산책 해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손녀가 커가면서 공원에도 처음 가 보았다. 엄마의 인생에는 아들이 전부였다. 아들네 세간난후 어느 땐가 엄마가 팔목이 절골 돼서 깁스를 하게 됐다. 그래도 아들 며느리 출근한 후이면 아들 집에 가서 한손으로 청소하고 빨래하고 옷궤도 정리해 주었다. 부엌에 소탕재도 퍼내고 불소시개까지 아궁에 넣어 놓군 했다.  올케가 병원 동료들에게 시어머니 자랑 해서 나는 후에 알게 됐다.


빛 한오리 없이 컴캄하던 엄마의 인생에 밝은 빛이 보였고 웃음기 하나 없던 엄마의 얼굴이 환해 졌고 말수가 너무 적었던 엄마가 하루 종일 손녀와 까꿍 하고 있었다. 손녀를 키우시느라 몸은 고달팠으나 엄마의 인생에서 젤 밝은 나날들이였다.


그런데 그게 그저 5-6년 세월 밖에 안 될 줄이야. 어느날 룡정에 있는 나한테 동생의 다급한 전화가 왔다. 엄마가 병원에 실려 갔단다. 나는 급히 연길시 병원에 도착했다. 오후에 엄마가 갑자기 혈분을 쏟았단다. 내 눈앞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튿날 여러가지 의학검사결과 소장암이란다.  너무 기가 막혀서 나는 병원 복도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왜? 왜? 왜? 울엄마가 왜? 불쌍한 울엄마가 왜? 주위를 생각할새 없이 목 놓아 울었다. 의사들이 결론이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연변병원으로 가자고 하니 엄마는 며느리 있는 시병원에서 하겠다고 했다. 날 잡아 수술 하러 들어가는데 엄마는 내손을 잡으며 동생과 화목하게 살라고 부탁을 했다. 엄마는 아마 유언을 남기고 싶었을거다. 수술을 했는데 배 안에 암덩어리가 꽉 차서 소장을 대략 한자쯤 때여 내고 봉했다. 수술후 거이 일년이 되였을가 할때 엄마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했다. 엄마의 상황이 뭘 말하는지 잘 알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동생한테 나 하나 밖에 없는데 이젠 친형제를 만나게하면 않되냐구. "되지 뭐. 그런데 그집이 다 못 사오." 라고 하시는 말씀이 겨우겨우 허락하는 심정을 넉넉히 읽을 수 있었다. 엄마는 꺼지는 생명의 희미한 빛으로도 여전히 그 아들을 비추려 애를 썻다. 그 형제들이 잘 살지 못하면 아들에게 부담이 될가봐. 엄마는 마지막 숨을 몰아 쉬면서 간신히 하는 한마디 말이 또 동생과 화목하게 살라고 했다. 이것이 엄마의 마지막 유언이였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나는 실신했다. 정신차리고 보니 꿈인지 생시인지... 우리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죽을 힘을 다해 불러 봐도 엄마는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길로 멀리 떠나셨다.

불쌍한 우리 엄마, 엄마의 인생이 불행한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모두 다 나때문였다.


엄마의 지식이 아깝습니다, 엄마의 미모가 아깝습니다, 엄마의 품성이 아깝습니다, 엄마의 인생이 아깝습니다, 엄마의 모두 모두 모두가 다 아깝습니다.다시는 안길 수 없는 엄마 품이 그립습니다.


엄마에게 이제라도 말하고 싶습니다. 부모한테 자식은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엄마의 인생은 자식을 위해서 전부를 바친 피눈물의 인생입니다.  엄마 이제라도 극락세상에서 엄마만의 인생을 맘껏 사세요. 

엄마 생전에 효도 한번 못 해본 이 불효자를 용서하지 마세요.

불효자는 웁니다.

/최청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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