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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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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6-03-08 20:04 조회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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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가문 막내딸로 태여난 나의 어머니는22살에 리씨가문 맏아들인 나의 아버지에게 시집을 왔는데 그때는 1965년이였다. 그때 나의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하고 안도현 장흥향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었는데 어머니보다 10살 이상이였다.


그때는 대학생이 너무나 귀한 세월이였고 또한 교편을 잡고있는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영화에서나 볼수 있는 백마왕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아버지도 어머니를 그렇게 이뻐하고 아끼셨다. 부모님의 사랑은 깨알같이 쏟아져 2년후에 어머니는 첫 아들 리경준이를 낳았고 또 2년후에 둘째아들 리성준, 또 2년후에 셋째아들 나(리기준)를 낳았다. 지금은 아들 둘이면 고생문이 열렸다고 하지만 그때는 딸보다 아들을 더 좋아하던 때라 아들 셋인 우리집은 남들의 부러움을 자아내기 일쑤였다. 아버지는 퇴근하면 우리를 넓은 품에 안아주고 어머니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렇게 달콤하고 행복한 생활은 지속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아버지 학교에서 공무로  남자 선생님 여러명을 조직하여 산에 가서 돌을 캤는데 아버지는 작업중 굴러오는 돌에 사고를 당하여 장흥향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이였다. 어머니는 눈앞이 아찔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안깐힘으로 이겨내면서 병원에 달려갔다. 아버지는 피를 너무 흘린 탓으로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다. 병원에서 모든 최대의 치료 방법을 다 했지만 몇시간 후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얼굴도 보지못하고 어머니와 마지막 말 한마디도 하지못하고 철없는 세 아들을 남겨놓고 영영 돌아가셨다. 그때 내 나이가 2살이였고 어머니의 나이는 31살이였다.


그렇게 행복하던 어머니의 인생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후부터 꼬이기 시작하였다. 우리집 소식을 들은 잘사는 집 특히 아들이 없는 집에서 우리 집에 찾아와서 애들을 행복하게 잘 키우겠으니 입양해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적지 않게 발생하였는데 그럴때마다 어머니는 애들은 절대 못준다면서 단호히 거절하였다. 자기의 피줄이고 살인 불쌍한 어린것들을 어떻게 무정하게 입양시킨단 말인가? 어머니의 모성애는 참으로 위대하다. 그런 모성애는 어머니가 아니고서는 절때 다 알수 없다.


다행히도 아버지의 학교에서 우리 세 아들의 생활비를 지원해주어서 우리 셋을 키우는데는 큰 곤난이 없었다. 애들을 잠재우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면서 잠 못드는 밤이 그 얼마였던가? 술 기운을 빌어 잠들려고 술 사러 상점에 나섰다가 비웃음을 당할까봐 참아 가지못하고 울음으로 지새운 밤이 또한 그 얼마였던가? 외로움도 서러운데 그것보다 더 서러운 것은 남편이 없다고 남들의 없임여김과 비웃음을 당하는 것이였다. 어떤 밤이면 웬 모를 남성이 집에 찾아와서 어떨가 하고 떠보는 목욕을 당할때면 아- 너무나 불쌍한 어머니는 자기의 인생을 의심할 정도였다.


친척과 친인들은 어머니에게 재가를 가라고 권고하였고 어머니도 재가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사람들을 통하여 남자 몇명을 소개받았다. 연길현(지금 룡정시) 동불향 금불사촌의 한 남자를 소개받았는데 첫인상도 좋았고 마음도 고와보였다. 그 남자는 자기의 전 안해는 심장병으로 세상을 떴고 아들딸 둘을 키우고 있는데 모두 우리 삼형제보다 나이가 이상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 남자가 사는 곳 금불촌에 직접 가보기도 했다. 그렇게 불쌍한 두 가족은 새 가정을 이루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잘 살아가자고 약속을 하고 어머니는 어린 우리 삼형제를 데리고 금불사에 재가를 갔다.


금불사에 도착하니 이렇게도 어이없을 줄이야! 아들딸 두 명밖에 없다던 새 아버지가 글쎄 아들3명 딸 2명에 자식 다섯이 있을 줄이야! 다시 장흥향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장흥의 집은 이미 다 처분을 했고, 학교에서도 이미 재가를 왔는데 우리에게 다시 생활비를 지원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어린 아들 셋을 데리고 안도진에 있는 외할머니네 집으로 간다는 것도 힘든 일이였다. 새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속인것이 미안하다고 손이야 발이야 사과하고 이미 온 김에 어쩌겠는가 하면서 절대 어머니를 고생 시키지 않고 우리 삼형제를 잘 키우겠으니 같이 잘 살자고 하였다. 어머니는 어쩔수 없이 못이기는 척하면서 머물러 있을수 밖에 없었다.


이때까지 이야기는 다 내가 후에 어머니와 친척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나에게 기억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친 아버지의 얼굴도 생각나지 않고 친 아버지에게 기억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하여튼 그때 내가 3살 정도였으니 그럴만도 하다. 어머니가 금불사에 금방 재가를 갔을 때 나는 새 아버지가 나의 친 아버지인줄로 알았다.


새 아버지도 마음이 곱고 성격이 좋아 나는 항상 새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서 재롱을 부릴때가 많았고 새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서 밥을 먹을 때가 많았다. 그런 모습을 본 나의 외할머니는 마음이 놓인다면서 어머니에게 새 아버지가 자식이 많다해도 마음이 곱고 어머니에게 마음 고생을 시키지 않으면 된다면서 여러번 이야기 했다고 한다. 어머니도 산림살이를 알뜰하게 잘하여 우리 집의 생활은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두 가족이 합쳐서 열식구가 오막살이 작은 집에서 같이 산다는게 그렇게 쉬운일이 아니였다.


모순도 적지 않았고 어떤 때에는 끼니를 에우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어머니는 항상 우리들에게 (새) 아버지와 그리고 새 형님과 누나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타일렀고 어떻게 하나 화목한 가정을 꾸려가기에 노력을 하였다. 그렇게 고생하면서 새 아버지의 두 아들과 큰 딸은 새 가정을 이루었고 우리 삼형제도 커서 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머니는 우리에 대한 교육을 절대 소홀하지 않았다. 항상 앞으로 공부를 잘해야 가난한 농촌을 벗어나 옥수수밥을 먹지않고 이밥을 먹을 수 있으며 돈도 많이 벌어 빈곤한 생활에서 해탈된다는 도리를 많이 설명해주었다. 가난한 집 애들이 먼저 셈이 든다고 나는 어릴쩍부터 공부를 잘하여 농촌을 떠나 크게 출세하고 싶었다.


어머니는 뢰봉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면서 뢰봉을 따라서 “생활은 낮은데 비기고 사상(학습)은 높은데 비기라”고 우리들을 많이 교육하였다. 어머니의 교육을 받아서 나는 형들이 입던 옷이나 바지를 받아 입어도 의견이 없었고 바늘로 기운 바지를 입고 다녀도 크게 아랑곳하지 않았고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금불사에서 소학교 첫학기를 끝내는 해에 우리집은 개산툰진 회경촌에 이사를 갔다. 회경촌은 금불사에 비하여 순 조선족이 집거하는 마을이고 생활 수준도 좋았고 촌학교 교육질도 비교적 높았다. 나는 인츰 새로운 소학교 생활에 적응하였으며 두달 후에는 반장으로 당선되였다. 그때부터 줄곧 반장으로 있으면서 학기마다 3호학생으로 되였다.


그때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학기마다 학부형회의 조직하였는데 학부형회의를 끝내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말하였고 항상 나에게 어머니는 나의 학부형회의를 참가할 때가 제일 행복한 때라면서 그렇게 기뻐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공부를 잘해야 어머니를 기쁘게 할 수 있고 어머니의 피곤도 풀어드릴수 있구나 생각하면서 공부에 더욱 열심히 노력하였다.


회경촌에 이사를 온 후 우리집 생활은 원래보다는 좋아졌지만 그래도 가난하였다. 어머니는 개산툰 장마당에 가서 닭알도 팔고 고추도 팔고 감자도 팔면서 생활용돈을 마련하혀 새 아버지에게 반주술도 싸 드리고 우리들의 옷도 사주고 학습용품도 사주고 학비도 마련하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동네에서 알뜰살뜰 산림살이를 잘 한다고 소문이 높았다.


어느날 내가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으니 일요일이였을 것이다. 점심 시간이 되여 일밭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구들에 올라오지도 못하고 구들목에 눕더니 입을 하 벌리고 코를 굴면서 주무쉬기 시작하는 것이였다. 그런 모습을 보는 나는 코마루가 찡하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주무시는 그 순간이나마 모든 피곤과 어렵던 일을 잊으시고 행복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어머니에게 조용히 베개를 가져다 드렸다.


점심을 먹고 나는 호미를 들고 어머니를 도와 일하러 같이 나섰다. 어머니는 나에게 조이밭 한고랑을 가리키면서 기음을 매는 방법을 간단히 배워주고 나더러 오후에 한고랑만 기음을 매면 된다고 하였다. 나는 어머니를 도와준다는 생각에 제꺽 기음을 매기 시작하였다. 조이밭 기음을 맨다는게 정말 쉽지않았다. 우선 조이와 풀의 구분이 잘 알리지 않아서 여간만 신경을 써야하고 호미보다는 손으로 풀을 뽑아서 제거하는 일이 더 많았다.


그런데 한참 지나니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쏘아나고 손바닥이 아파나기 시작하였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어머닌들 힘들지 않겠는가? 나는 어머니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고생하는데 끝까지 방조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끝까지 견지하였다. 기음을 다 매고 나니 저녘 노을이 지기 시작하였다.


어머니는 나의 손을 보더니 손에 수포(水泡)가 생긴것을 보고 농사일이 쉽지않지 하면서 몹시 가슴 아파하셨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이런 농사일을 하지않으려면 공부를 잘하여 출세하는 일밖에 없다면서 차근차근 타일러주었다. 하긴 나는 농사일은 죽어도 못할 것 같았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공부를 잘해서 출세를 하여 경제적으로 어머니를 도와주는 것만이 내가 가야하는 길임을 깨닫게 되였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회경소학교 졸업생들은 광소향 정동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초등중학교에 올라간 후 나의 학습성적은 더욱 우수하였으며 줄곧 학년 1등을 유지했다. 심지어 초중 1학년때 초중 2학년 현(縣)수학경색에까지 참가하기도 했다. 나의 둘째형(리성준)은 초중을 졸업하고 장춘전력학고에 입학하였고 나는 그 이듬해에 연변일중에 입학하였다.


편벽한 농촌에서 동시에 두 아들의 생활비를 댄다는 것은 여간만 어려운 것이 아니였다. 우리집은 담배잎농사도 하고 소도 키우고 돼지도 키우면서 번 돈은 대부분 나와 나의 둘째형의 생활비에 들어가고 생활은 언제나 어려웠다. 그것도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담배잎을 말리는 건조실에 불이 났을 때, 금방 낳은 돼지개끼 13마리가 하루 저녁에 몽땅 얼어죽었을 때, 그렇게 많은 곤난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견강하게 살아온 어머니였다.


고중2학년 때였다. 5.1국제노동절에 학교에서 휴식하여 나는 연길에서 집으로 갔는데 우리집에 들어가니 그렇게 깨끗하고 아담하던 집은 스산하기 그지없었고 웬 모를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나를 처음 보는지라 의아한 눈길로 누구를 찾는가고 물어보는 것이였다. 나는 이집의 막내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혹시 구군가고 되물었다. 그 분들은 자기네는 새로 이사온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나를 알만하다면서 그렇지 않아도 나의 어머니께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하면서 우리 집은 웃 마을로 이사를 갔다는 것이였다.


집을 나오면서 길에서 친구의 부모를 만났는데 친구의 부모는 나에게 “기준아, 참 안됬구나,어쩌니?”하면서 말을 시작하는 것이였다. 글쎄 우리 집 소가 기차길을 지나다가 기차에 치여 죽었다는 것이였다. 배상도 없고 소고기를 팔았았지만 돈도 얼마 안되였다는 것이다. 그때 소 한마리면 농촌에서 큰 자산이였는데 소가 죽었다니? 농사일은 또 어떻게 하고?


웃 마을은 원래 사는 마을보다 더 편벽한 곳이다. 물은 낮은데로 흐르고 사람은 높은데로 간다는 말과 같이 이사를 가면 더 좋은 곳으로 가야지만 외지에서 공부하는 우리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집을 팔고 더 못한 곳으로 이사를 가겠는가? 지금 사는 마을은 웃 마을보다 좋으니 웃 마을에 비해 집값이 상대적으로 비싸서 집을 팔고 사고 떨어진 돈으로 소도 싸고 우리 생활비도 대려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웃 마을로 걸어가는 나의 마음은 종잡을 수 없었고 눈물이 주루룩주루룩 흘러내렸다. 어머니 이 아들 때문에 너무나 고생많은 어머니, 이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출세를 할 때면 어머니를 이 세상에서 제일로 행복한 어머니로 높이높이 모시겠습니다. 조금만 더 수고해주세요. 미안합니다. 어머니……


고생끝에 락이라고 둘째 형도 졸업하고 룡정전업국에 분배 받았고 나도 졸업하여 룡정직업고중에서 2년간 교원사업을 하다가 청도에 있는 외자기업에 출근하였다. 나는 어머니에게 용돈도 적지않게 붙혀드리면서 맛있는 음식이랑 많이 사드시고 어버지에게도 반지술을 떨구지 말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많이 노력하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나는 딸들처럼 어머니와 따뜻이 말할 줄도 모르고 그저 어머니의 경제적 부담을 많이 덜어주기에 노력한 것 뿐이다. 우리 자식들은 다 결혼하고 어머니의 손자손녀들이 커갔다. 동네 사람들이 어머니를 보고 자식들 다 출세 시키고 복이 터졌다면서 이제는 근심을 더시고 만년을 잘 보내라고 할때면 어머니는 그렇게 행복해하셨다고한다.


어머니는 우리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였고 어머니의 일생은 자식들을 위한 일생이였다. 그런 어머니가 있어서 나는 자랑스럽다. 그런 어머니를 나는 한없이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성격문제인지 아니면 무슨 문제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머니에게 고맙다는 말 몇번 하지않았다. 속으로는 어머니가 그렇게 감사하고 어머니를 그렇게 사랑하지만 어머니에게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몇번 한 것뿐이고 사랑합니다란 말은 한번도 한적이 없다. 그저 어머니에게 돈을 많이 붙혀주면 잘 한거라고 생각했고 어머니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면 다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날 회사에서 출근하는데 어머니께서 전하가 왔다. 나는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고 물어보자 어머니는 아니라면서 그저 이 아들이 잘 있는가 궁금해서 전하를 했다는 것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잘 있고 애들고 잘 크고 회사일도 잘되고 있으니 근심말라면서 지금 회사일이 바빠서 다시 전하를 하겠다고 하고는 전하를 놓았다. 그렇게 어머니께서 몇번 전하가 왔는데 나는 기본상 비슷하게 말하고는 전하를 놓군했다. 이 아들이 얼마나 보고싶었으면 아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듣고싶었으면 전하를 했을까? 나는 그때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정말 잘 몰랐다. 후에 어머니에게 전하를 해도 문안 인사외 다른 말은 크게 없이 전하를 놓군 했다. 지금에 와보니 후회되기 그지없다.


나이가 들고 나의 자식들도 커면서 와보니 그때 그 일이 너무나도 가슴아프게 느껴진다. 그때 어머니에게 “어머니, 어머니는 우리를 위해 한생을 바쳤습니다. 어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지금 잘 나가고 있습니다. 근심 마시고 이제 어머니를 보러 가겠습니다. 어머니 잘 보내세오. 사랑합니다!” 이렇세 싹싹하게 말했더라면 어머니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값는다고 했는데 왜 어머니에게 기쁨을 주는 그런 말을 못했을가? 이 놈의 말 한마디 값이 몇푼이나 된다고. 나는 참 불효한 자식이다. 이런 아들놈을 키워서 뭘 한단말인가?


몇달후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큰 형님(리경준)에게서 전하가 왔다. 원래부터 혈압이 높은 어머니가 위급한데 아마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다. 나는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그때 청도에서 연길까지 직행 비행기가 없어서 나는 북경을 거쳐 다시 연길에 도착하여 집에 이르니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 어머니는 입을 꼭 다물고 있었는데 년세 많은 분의 말에 의하면 어머니는 한이 없이 돌아갔다고 해석하였다. 그렇게 보고싶은 이 불효한 놈의 얼굴도 보지못하고 이 불효한 아들과 마음껏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자식들을 위해 한생을 고생만 하면서 살아오다가 복도 얼마 누리지 못하고 61세의 나이에 인생을 마감하였다.


푸른 하늘에 둥근 달이 떠오를 때마나 나는 어머니가 생각난다. 둥근 달은 어머니의 얼굴같아 보이고 달속에는 어머니가 있는 것 같고 달속의 어머니는 나를 보고 훤히 웃는 것 같다. 부지런히 일하고 일전도 쪼개쓰며 한없이 보내준 어머니의 그 사랑이 사무치게 그리워난다. 달속의 어머니는 너무나도 따뜻하고 포근한 그 넓은 품에 나를 안아준다. 수십년을 하루같이 부지런히 일하며 사심없이 보내준 어머니의 사랑이 나의 가슴에 뜨거운 전류가 되여 흘러온다. 달속의 어머니는 나를 쓰다듬어 준다. 추우면 추울세라 더우면 더울세라 끝없이 보내주던 사랑의 손길로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어머니,어머니! 불효한 이자식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단란한 설명절도 몇번 못쇠드리고 문안의 전하도 제대로 못한 불효한 놈입니다. 아들의 목소리가 그리워 멀-리-서 걸어온 어머님의 전하에도 바쁘다고 몇마디 못한 무정한 놈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더 속죄여지고 그리워집니다. 후회의 눈물이 강이 되고 바다 되여 흘러갑니다. 어머니, 어머니! 자식위해 가정위해 촛불처럼 살아오신 어머니 고생끝에 락이라지만 너무나 일찍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 그 곳에서 부디 행복하게 보내십시오. 사랑합니다. 어머니!

/리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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