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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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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6-03-11 12:32 조회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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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사랑은 내물이라면

아버지 사랑은 산이랍니다.

말없는 진정을 쏟아 바치고

키워준 은정에 목이 멥니다.

아버지 아버지 장수하세요

복많이 받으세요

나의 아버지

.....

들어도 들어도 구구절절 심금을 울려주는 노래이다.

머나먼 저 세상에 떠나가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불이야 불이야 ...


우리 아버지는 다섯자매를 둔 딸부자다.

자상하시고 외향적이며 활달한 분이신 아버지는 훌륭한 남편이고 최고의 아버지다.

지식인이고 문화인이였던 아버지는 연변의학원이 성립하여 입학한 첫대학생이고 글도 잘 쓰고 노래도 잘 부르며 춤도 잘 추고 하모니카도 잘 분다.


보통 다재가 무재라고들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다재다능 하셨다.

아버지는18세에 자기보다 한살우인 어머니와 한번 만나 보지도 못하고 동네에서 귀머거리란 소문까지  듣고도 부모님 언약을 거역하지 못하고 결혼하셨다.

소문은 다행이 헛소문이였다.

어머니는 귀머거리가 아니였다.


유식하신 아버지와 무식한 어머니는 인연을 맺고 50년도 넘게 살아왔지만 우리 자매들은 두분이 말다툼 하는걸 한번도 보지 못했다.그 미덕은 고스란히 우리 자매들에게 전수되였다.


아버지는 대학생이고 어머니는 문맹이였지만 아버지한테서 어머니를 업신여기는 말을 한마디도 들어본적이 없었다.두분의 정은 좋았다.두 분은  그 년대에도 참으로 멋잇게 사셨다.영화구경도 자주 가고 산보도 함께 하면서 그 시대에 금슬이 좋기로 소문난 잉꼬 부부였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딸만 낳았다고 천대하는 일이 없었다.오히려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시여 친척들이나  동네에서 부러워하는 롤모델이였다.


1954년5월5일 단오날,와 하고 울음보를 터뜨리며 내가  넷째딸로  태여났다.어머니는 너무도 섭섭하여 울면서 “우,또 딸이네”라고 탄식했다.

그렇게 아들이길 기대했는데.


아버지가 옆에서 ”딸이 어떻소.”라고 어머니를 위안하면서 “우리 이쁜 넷째딸 이름은 뭐라 짛을까?”하시더니 그 자리에서 세상에 존경받는 계집애가 되라고 경희라고 지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60대에 들어선 나는 늘 지나온 삶을 회고해 보군 한다.


몇년간 중앙조선말방송 객좌강사로 강의도 하고 자녀교육 리더십강사로 사처로 다니면서 교육도 하였다.연변 주내 여러분야에서 활약하면서 남들의 존중을 받을때면 아버지가 짛어준 이름덕이 아닐가?는 생각을 떠올려 보게 된다.

아버지는 신선이다.


막둥이 딸이 태여 났을때도 마찬가지다. “덕”을 보는 녀자가 되라고 덕희라 이름 지어주었다. 덕희가 살아온 경력을 돌이켜 보아도 그 '덕'자 혜택을 든든히 본것 같다.아버지덕에 연변위생학교에 출근 하였으며 부모님덕에 부모님이 살던 유일한 집을 가졌다.다섯형제 막내로 자라면서 언니들의 사랑도 듬뿍 받았다.금년에도 회갑해라고 비상시기에 모일수는 없지만 둘째언니 생일파티 해준다,셋째언니 장수국수 사준다, 이렇게 여러 형제들의  덕을 보며 행복하게 살고있다.


아버지는 락관적이고 쾌활한 분이시다.

우리 자매가 모이면 제일 많이 웃으며 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내가 일곱살때 일이다


그시기 아홉식솔 거느리면서 후근부장으로 제일 고생하는 분은 어머니시였다. 없는 살림에 하루세끼 밥상을 갖추랴, 손재주 좋은 재간으로 우리 자매들 옷도 손수 짛어 입히랴 어머니는 정말 눈코뜰새 없이 보내셨다.

어느한번 원래 잠이 많은 어머니가 저녁식사 마치고 막둥이 저고리를 하다가 머리를 끄덕끄덕 졸더니 앉은채로 끔벅 잠이 들고 말았다.


어머니의 눈에 낀 안경을 보는 순간 아버지의 장난기가 발동하였다. 빨간 색종이를 손으로 조금 미여가지고 침으로 어머니 안경에 붙혀놓았다.그리고는 숙제하고 있는 딸들에게 손 시늉으로 지휘하셨다.


“불이야 개똥애네 집 구새에 불이 났소.”우리는 아버지 지휘에 따라 밖으로 줄달음치고 어머니는 와닥닥 놀라 깨시더니 본능적으로 뽐프옆에 놓여있던 바게쯔를 들고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 광경을 본 우리는 배를 끓어 안고 구들에서 댈댈 구블며 웃고 또 웃었다. 그제야 상황파악을 하신 어머니가 한참 웃는 우리를 지켜보시더니 무참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여 한창 아버지를 원망하셨다.


밖에서는 남들의 존경받는 지채높은 의사이면서 사랑하는 안해와 아이들과는 익살스레 놀아주면서 아름다운 이야기거리를 만드신 아버지, 이 이야기는 우리 가족이 대대손손 구전으로 전해지는 추억거리로 되였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우리 자매들도 애들과 숨박꼭질도 잘 놀고 춤도 잘 추면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가고 있다.

화목한 가정에서 훌륭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우리 다섯자매의 성격은 모두 외향적이고 활발하며 익살스러워서 모여앉으면 막상막하이다.


우리 아버지는 자상하신 분이시다.

어머니가 가무일에 바쁘시다고 아버지는 딸들의 학부형회의를 도맡아 참가하셨다.


매번 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오시면 가족들을 모여 놓고 회의를 소집하셨다. 목책에 열심히 기록한 회의 내용들을 우리에게 제때에 전달하시고 정확하게 집행하셨다.우리 형제중 셋째언니는 신흥소학교 대대장으로서 아버지의 자랑거리이자 우리 가문의 영광이였다.매번 셋째 언니의 학부형회의에 다녀 오시면 아버지는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고 기분이 좋아서 어깨가 으쓱해졌다.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꼭 사탕 혹은 과자를 사오셔서 우리 형제들을 같이 격려해주시군 하셨다.우리집 자랑 셋째  언니 덕분에 우리 입도 덩달아 호강했는데 그 달콤한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입가에 웃음을 짓게 된다.


존경받으며 살아온 나나 덕을 받으면 살아온 동생이나 모두 아버지의 자랑거리였지만 유독 셋째에 대한 자부심은 더 강하셨다.

아버지는 지혜로우셨다.


그 세월에 어머니가 힘들게 다섯딸을 낳으셨다면 아버지는 우리 다섯딸들의 개성을 하나하나 잘 파악하시고 잘하는 쪽으로 이끌어 주면서 우리의 교육을 책임지셨다. 참으로 다섯딸의 아버지로 되기에 손색이 없는 아버지셨다. 아버지는 그 시절에 집안에 벽보란도 꾸려놓았고 서로 평론도 하면서 우리는 심신이 건강하게 자랐다.휴식일이면 시골에 있는 친척집에 데리고가서  일도 거들면서 자연과 함께 우리의 인성도 돈독히 하셨다.참으로 지식인 아버지의  역할 덕분에 우리 자매는 반듯하게 자랄수 있었다.


나는 “출발선에서 이겨라(赢在起跑线)”이란 말을 참 좋아한다.

아버지 훌륭한 교육덕분에 우리 다섯 자매의 시작은 다른 집 아이들보다 앞섯다. 그 혜택을 우리는 평생 누리며 살았다고 해야 할것 같다.

아버지는 원칙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아주 엄격하셨다.


항상 정직하고 거짓말하지 않는 진실한 사람이 되라고 교육하면서 절대로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이나 견해가 자기와 부동하다 하여 다툼질하거나 반대편으로 만들지 말고 용서하고 단결하여 조화롭게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야 한다고 부탁하셨다.어쩌면 무난하게 주위사람들과 어울리며 사는 법을 가르치지 않으셨나 생각해 본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참으로 선경지명이 있으신 분이다. 참 원견성이 있은 아버지 그 년대에 보기 드문 지식인이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녀자는 자기 자신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하며 노력하여 공부를 잘하여 능력을 키우고 남자보다 못지 않는 자신감을 가지라고 하셨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남녀평등 교육을  받았으며 꼭 커서 이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하는 책임감있는 사람이 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 다섯자매는 모두 이쁜녀자는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칭찬속에서 아버지의 믿음으로 우리는 기 죽지 않고 누구보다 자신감있게 성장했다.

아버지는 의료계통에서 학술이 높은 분이여서 출장도 많이 다니셨다.

어느 한번 수도 북경에 출장갔다 오시면서 색갈 고운 적삼을 사오셨다.


이쁜 적삼을 입고 우린 아버지의 지휘봉에 맞추어 합창을 시작했다. 세계명곡 “반달”. “볼가강반에서’를 불렀다.그 당시 소학교 1학년이였던 나는 지금도 가사를 생생하게 기억할수 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쪽배에...”

‘늙은이도  젊은이도 어머니의 볼가저강을 ...”


아버지의 락관적이고 쾌활한 성격으로 우리 가정은 화목하였고 동네에 소문난 "애들이 공부 잘하는 집"이였다.

아버지는 외가집에도 손색없이 잘 하는 맏사위였다.

외가집은 연집향 남계촌 시골에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외할머니 홀로 다섯남매를 키워야 했다.

집안에 맏사위인 아버지는 아들 맞잡이로 외가집에 크고작은 일들을 해결하시였다

때 맞추어 돈도 보내고 약도 보내시였다. 어린 두 외삼촌은 연길에 있는 우리집에 와서 공부를 하여 대학도 다니고 결혼까지 치르었다. 아버지가 외할아버지 빈자리를 든든히 채워준 셈이다.


“세상에 너희들 아버지 같은분은 없다.비단 같은 마음에 수평이 있고 외가집을 잘 돌본 공신이다.”

어머니는 살아계실때 명절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절찬하시군 하셨다.

아버지는 훌륭한 남편이며 최고의 아버지였다.


아버지 교육을 받고 자란 다섯 딸들도 사회에서 각자 자기몫을 잘 담당하고 있다.특급교사, 고급공무원, 회계사, 성 로력모범, 주 우수공산당원으로 각자가 부동한 강위에서 사업을  잘 하였다. 83세인 큰언니가 작년에 아버지곁으로 떠나시고 남은 딸들은 인젠 정녕퇴직하고 만년에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


딸부자 우리집 아버지의 이끔대로 대대손손 책임감을 가지고 사업을 잘하는 천금같은 유산은 지금도 외손자 외손녀들 증손자 증손녀들 한테도 전해가고있다.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딸 부자집 외손자 외손녀들도 청화대학 중국협화의과대학 북경사범대학  등을 필업하고 일본박사,영국석사, 청화대학 석사, 중국협화의과대학석사로 현재는 의사, 강사, 기업인으로 열심히 이 사회를 위해 공헌 하며 전통과 맥을 이어가고 있다.


증손녀 증손자까지도 할빈의과대학, 미국 마하둔 음악학원을 필업했다. 얼마전 편곡을 전수한 둘째언니 외손자가 내가 쓴 가사 한수를 편곡까지 해주었다.


아버지가 우리 곁을 떠나신지도 32년이 된다. 사회 일원으로 각자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온 우리 자매들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60세를 넘어가면서 점점 아버지의 사랑에 목이 메여온다. 산 같은 아버지의 그 사랑, 오늘도 아버지의 그 자상하신 얼굴이 보고싶고 다정한 그 목소리가 듣고싶다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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