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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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6-03-11 12:33 조회27회 댓글0건본문
글 머리에
우리 아버지는 연변의 제1대 지질학자이다.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지질탐사부문에서 근무하면서 백두산 상상봉에서부터 두만강출해구까지 연변산천 곳곳을 두발로 누비면서 수많은 탐구와 연구를 하셨다. 여기에 아버지가 직접 참여하고 직접 쓰신 “백두산야회실습기”를 올리며 사랑하는 아버지를 그려본다.
“백두산야외실습기”
1954년초 연변대학지리학부에서는 학기말 실습지점을 백두산으로 정하였다. 송영환 강좌장이 실습지도를 책임지고 나는 준비사업을 책임졌다. 나는 계획에 따라 야외에서 잘수 있는 천막 6개와 비옷, 실습복, 가방,배낭 등을 각각 40벌을 합동 구입하였다. 그리고 야외에서 먹을 쌀, 반찬 그리고 만일의 경우를 고려하여 사탕과 과자도 준비하였다.
1954년 8월 4일(구름이 많다가 비가 내림)
오전 8시에 학생들을 집합시키고 송영환 강좌장이 실습동원 보고 끝에 변방부대에서 파견한 3명의 보위병을 소개하였다.나는 준비된 모든 물품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지리전업이 최고”라고 엄비손가락을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30여명을 태운 화물차는 학교교문을 떠나 백두산으로 향했다. 학생들은 흥분되여 “자동차운전수의 노래”, “봄노래”,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 명월구를 지나 송강방향으로 가는데 비가 억수로 내리기 시작하였으나 학생들의 노래소리는 끊을줄 몰랐다. 황구령기슭에 도착하였는데 비는 계속 내려서 장동차바퀴는 진흙길에 빠져 돌기는 하나 나갈수 없었다. 모든 대원들은 근심에 잠겼지만 경험 많은 한종기 운전수는 미리 준비한 밧줄을 견인고리에 매고 건장한 학생들더러 바줄을 당기라고 명령하였다.
자동차는 저속으로 천천히 진흙탕에서 빠져나왔다. 허나 경사 급한 곳에서 또 빠져 바퀴만 제자리에서 돌아가는것이였다. 기사가 삽을 들고 주위에 있는 모래를 차바퀴 앞에 펴니 학생들도 따라 삽을 들고 모래와 풀을 차바퀴앞에 폈다.그리고 나서 앞에서 차를 당기면서 저속으로 겨우 앞을 향하여 나갔다. 대오는 기진맥진하여 휴식을 선포하였다. 이 기회에 운전기사는 사람이 곰을 만난 실화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그 하나는 송강합작사의 기사가 차를 몰고 황구령에 도착하였는데 목탄이 잘 타지 않아서 자동차속도가 대단히 늦었다. 차가 굽인돌이를 도는데 길옆의 자작나무수풀에서 100여근 되는 곰이 나와 자동차앞을 막고 차를 아래로 밀었다. 차는 힘이 없어 후퇴했다가 다시 전진했는데 곰도 약간 후퇴하다가 다시 힘을 주어 차를 아래로 밀어 차가 전진할수 없었다. 차는 할수 없이 또 뒤걸음쳤다 한다.
때마침 긴장했던 기사가 정신을 차리고 저속으로 마력을 다하여 전진하다가 갑자기 후퇴하여 곰을 엎어뜨리고 그 기회를 리용하여 큰 마력으로 전진하면서 곰을 깔아눕혔다 한다. 다른 하나는 이도백하 운전수가 명월구에 와서 콩기름을 짜가지고 두병과 기름을 싣고 귀가하는 길이였다 한다. 황구령기슭에 닫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산중턱에 이르니 도로가 미끄러워 차속도는 매우 늦었다. 한참 올라가는데 길옆의 가둑나무숲속에서 큰 돼지만한 곰이 나와 차에 올라탔다. 기사는 너무도 긴장하여 고속으로 차를 몰고 이도백하 파출소앞에 도착하자마자 재빨리 무장경찰에게 달려가 곰이 차우에 있으니 처리하여 달라고 청하였다. 무장경찰이 장탄을 한 총을 들고 뛰쳐나가 보니 곰은 차우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몸은 차멀미를 하여서인지 좌우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무장경찰의 총 한방에 곰이 쓰러졌다 한다. 아슬아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학생들은 피로를 풀었다.
1954년 8월 4일 저녁
고생끝에 송강에 도착하니 초대소가 하나밖에 없어 교원들이 초대소에 들고 학생들은 민가에 분배받아 들었다. 자동차기사는 이도백하로 가는 길을 조사하고 저녁 늦게야 돌아왔다. 길이 나빠 차는 갈수 없으니 도보로 갈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촌장을 찾아서 천막 등을 운반할 사람 4명을 요청하였다. 우리는 피곤도 풀고 걸어갈 준비를 하기 위하여 하루동안 휴식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반찬문제를 토론하는데 촌장이 말하기를 이곳은 교통이 불편하여 돼지고기가 매우 싸다고 하였다. 값을 물어보니 2일 동안의 화식비면 살수 있었다. 떠나기전 생활개선을 톡톡히 하였다.
1954년 8월 5일(구름이 많다가 가는 비 내림)
아침식사를 마치고 생소한 송강의 자연정황을 료해하기 위하여 5명의 남학생과 2명의 여학생을 데리고 야외로 나갔다. 송강진의 남쪽에는 강이 흐로고 강남에는 전형적인 1급과 2급단구가 있었으며 지층은 백악기의 호성층인 혈암인데 그 속에 에스테리아라는 화석이 있었다. 함께 오지 못한 학생들은 위하여 표본을 촬영했고 기념사진도 몇 장 찍고 돌아왔다.저녁식사후 학생들에게 야외조사 상황을 이야기하였다. 강의가 끝난후 나는 촌장으로부터 장백산 반특무투쟁상황을 들었다. 어느 날 송강리발관에 낯선 손님이 와서 리발하였다. 리발이 끝난후 그 손님이 진정부에 데려다 달라해서 진정부로 안내했는데 알고보니 특무였다. 그 특무는 자기의 생명만 보호해준다면 모든 것을 탄백하겠다고 말하여 진정부는 꼭 담보한다고 하였다. 특무는 자기들의 지휘부는 장백산동굴이고 3,4명은 농촌과 시내에 나와 민심을 조사한다고 하였다. 특무의 말이 끝나자 진정부에서는 현정부에 련계하여 특무를 현에 압송하였다. 그후 송강진에서는 3명의 반특무영웅이 나왔다.
그중 한사람은 산에 있는 보초막에서 보초를 서고있는데 별다른 옷을 입은 사람이 지나가는데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보초막안에 있는 허술한 수류탄을 들고나가 “너는 뒤를 보지 말고 나의 지시대로 걸으라”라고 하였는데 순순히 말을 들어 쉽게 진정부에 도착하였다. 조사하니 국민당에서 파견한 특무였다.
두번째 사건은 두 형제가 마차를 가지고 밭에 있는 콩을 운반하러 갔는데 색다른 옷을 입은 사람이 돈을 후하게 줄 테니 콩을 팔라고 하였다 한다. 동생은 형을 보고 마차에서 내려 콩값을 받으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려 할 때 동생이 뒤에서 덮쳐 그 사람의 손과 몸을 함께 틀어쥐고 형이 그 사람의 손을 묶었다. 진정부에 호송하여 조사하니 특무였다. 두 형제는 변방부대의 반특무대회에서 영웅칭호를 받고 후한 상금도 받았다 한다.
1954년 8월 6일(구름이 많다가 비 내림)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8시경에 이도백하를 향하여 떠났다. 송강을 지나 2급 하안단구에 이르니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도로 좌우에는 활엽수와 관목이 우거지고 길은 흔적만 있을뿐 잡초가 무성하여 억망진창이였다. 길옆에 딸기가 드문드문 있어 뜯어 먹으면서 행군하니 피곤도 잊었다. 그러나 가는 길에 종종 뱀을 만나서 머리털이 곤두섰다. 뱀은 길이가 0.5-1메터 좌우로서 거의 50메테에 하나씩은 나타났다.
쉬여가기 위하여 다리밑에 들어갔더ㅣ 그곳은 뱀의 천지였다. 길이가 50센티메테 정도 되는 뱀들이 대가리를 추켜든 것이 100마리는 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처음 보는 광경이라 놀라 즉각 그 자리를 떠나 또다시 풀속을 헤치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송강을 지나 약 20리를 지났는데 관목속에서 난데없는 몇마리의 노루가 갑자기 귀를 기웃거리며 우리를 보다가 도망가버리고 풀속에서는 토끼가 뛰여나와 귀를 세우고 우리를 보다가 달아났다. 가는 길에 우리는 이런 상황을 여러 차례 목격하였다.수림속에서 검은 곰이 우리를 향해 보다가 슬그머니 머리를 돌리면서 수림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어떤 곰은 태연하게 우리를 보면서 길을 건너 수림속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우리는 보행하면서 여러 차례 야생동물을 보아서 마치 자연동물원을 지나는 것 같았다. 길잡이한테 이곳에 호랑이 있는가고 물어보았더니 있다고 하면서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몇 년전 이도백하 소학교교장이 보호견을 데리고 송강에 회의하러 갔다가 밤중에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하루는 송강에서 나와 남쪽에 있는 언덕에 올라 섰는데 뒤에서 쌍불을 켠 호랑이 따라왔다. 교장이 쉬면 범도 쉬고 교장이 걸으면 범도 따라 왔다. 이렇게 10여리를 따라오던 범이 갑자기 교장에게 덮치려는 이 위험천만한 순간에 개가 달려가 범의 목을 물었다. 범은 급하게 선자리에서 맴을 돌다가 쓰러졌다. 교장선생은 너무 무서워 그 곁으로 가보지도 못하고 집으로 내뛰였다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마을사람들과 같이 그곳에 가보니 범은 죽었고 개도 범의 목을 문채로 죽어있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백두산 변방부대지휘부에서 변방정활을 알기 위하여 병사를 변방초소에 보냈는데 돌아오지 않고 먼데서 총소리가 났다 한다. 지휘부에서 몇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총소리가 난 쪽을 향하여 가는 도중 길복판에 호랑이 쓰러진 것을 발견하고 그 앞을 보니 전사도 쓰러져있었다. 전사가 개복한 다음 물어보니 호랑이가 계속 뒤를 따르다가 갑자기 앞에 나타나서 총을 쏜것만이 기억된다고 하였다.
이곳에는 승얀이도 많다고 하였다. 밤에는 마을에 내려와 돼지를 훔쳐가고 로랑포일대에서는 밤이면 승냥이들이 모여 운다하여 로랑포라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사실이였다. 우리가 이도백하에서 백두산을 가는 중간에서 휴식하는데 밤중에 남쪽에서 승냥이의 울음소리가 나는데 마치 어린애의 울음소리와도 같았다. 듣고보니 이곳의 식물련(食物连)은 아주 전형적이였다. 풀과 관목이 있으니 토끼와 노루,사슴이 자라고 토끼와 사슴이 있으니 승냥이가 있고 사슴,노루, 승냥이가 있으니 그것들을 잡아먹는 호랑이, 곰이 있어서 자연생태가 전형적이였다. 지금은 그 많던 토끼, 노루가 다 어디로 갔는지? 왜 없는지?
우리 일행은 온종일 비를 맞았지만 비옷을 입고 있어서 웃옷은 젖지 않았으나 바지는 몽땅 젖었다. 이도백하에 도착하니 초대소가 없어 민가에 나누어 들고 젖은 옷을 화로불에 엇갈아 말리웠다.
1954년 8월 7일(비내림)
백두산을 향하여 떠났다다. 백두산으로 가는 데는 길이 없어 초빙한 길잡이를 앞에 세우고 원시림에 들어섰다. 온종일 원시림을 가다가 작은 강물을 만났다. 그곳에 천막을 치고 하루 저녁 보내기로 하였다. 실습대원들은 각기 자기의 배낭에서 쌀을 꺼내여 강물에 쌀을 씻은 다음 항고(고리있는 도시락)에 담았다. 막대기에 항고를 꿰여서 모닥불우에서 밥을 지었다. 식사가 끝난후 원시림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첫째, 원시림에는 왜서 소나무뿐인가? 둘째, 활엽림대에는 뱀이 많았는데 침엽립대에도 뱀이 있는가?
활엽림대에서는 뱀의 먹이로 될수 있는 각종 동물과 곤충들이 많다. 하여 뱀은 많았지만 침엽림대는 기온이 낮고 뱀의 먹이로 될수 있는 각종 동물과 곤충이 없어 뱀이 없다고 하였다. 셋째, 원시림에는 나무가 넘어진 것이 많은데 그 원인은 본 지방의 토양층이 얇아 뿌리가 땅깊게 내려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토양층아래는 현무암이여서 뿌리를 깊게 뻗을래야 뻗을수 없기에 쉽게 도목한다고 설명하였다.
1954년 8월 8일(맑음)
모든 대원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천막을 거두고 아치식사준비를 하였다. 식사가 끝난후 길잡이를 따라 산림속을 헤쳐가며 백두산 방향으로 걸어갔다. 약 3시간쯤 걸으니 침엽림은 없어지고 화산추체의 산록임을 알리는 벗나무숲에 도착하였다. 목적지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우리는 길잡이를 따라 서쪽을 향하여 걸어가다가 방향을 바꾸어 남쪽으로 가니 곧바로 우리의 목적지였다. 주위는 선태류가 자라고 그 우에는 봇나무가 자랐는데 백두산의 거센 바람을 이기지 못하여 동쪽으로 기울어졌다.
땅은 녹색 천지여서 흙을 볼수가 없었다. 남쪽에서는 폭포소리가 울리고 서쪽에서는 맑고 맑은 하천이 흐르고 북쪽 넓다란 “u”형곡 주변에는 웅장한 산들이 웅기중기 들어앉아 있고 계곡에는 아직도 적설이 쌓여있었다. 조사대원들의 아주 훌륭한 숙영지라고 느꼈다. 우리가 저녁준비를 하고있는데 낯선 사람 세명이 나타났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무엇으 하는가고 물었더니 그분들은 포수인데 주로 백두산을 감시하는 일을 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연변대학에서 온 것을 알고 포장된 반 지하문을 열면서 자기네는 딴곳에 갈 테니 선생님들이 쓰라고 하였다. 포수막에 들어가보니 벽에는 몇십틀 되는 록용이 걸려있고 출입구 한쪽에는 몇십근 되는 록태가 쌓여있었다.
저녁때가 되였다. 송선생님과 녀학생들은 포수막에서 자고 우리는 천막에서 의의있는 하루밤을 보냈다.
1954년 8월 9일(맑음)
식사를 끝마치고 깊이 4메터, 너비 0.4메터되는 이도백하의 돌담을 딛고 건너 남,녀학생들이 하나건너씩 서서 500메터 되는 절벽을 톺아 올라야 했다. 앞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뒤사람이 손톱을 박으며 톺아올랐다. 숨이 막히고 다리가 후둘후둘 떨렸으며 허리에 맨 실습필기장마저도 무거웠다고 학생들은 말하였다. 송영환선생님은 학생들이 준 바줄을 잡으면서 금벽등성이에 도착하였다. 나는 하곡지형을 관찰하다가 금벽에서 사당 두개를 발견하였다. 그중 하나는 너비 2메터, 길이 4메터 정도이고 집안에 높이 70센치메터되는 돌로 쌓은 대가 있었다. 다른 하나는 사당북쪽에 있었는데 너비 2메터, 길이 3메터 좌우였다.
사당은 창문이 없고 남쪽에 문자국만 남아있었다. 보아하니 이곳은 도교의 사당인데 해방후에 자리를 감춘 것 같았다. 금벽에 올라서니 넓다랗고 경사진 이끼선태류가 빼곡이 자란 룡문봉 북쪽경사지였다. 우리는 남북방향으로 된 비탈을 따라 룡문봉과 녹제봉사이에 도착하고 보니 아끼선태류우에 여러가지 양철깡통들이 있었다. 너무도 이상하여 길잡이에게 물어보니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50년대초에 장백산특무숙청이 있었다. 한번은 무전수 특무를 포로하고 설복하여 그더러 비행기를 이곳에 오게 한 다음 구호선을 내려보내달라고 하면 살려줄뿐만 아니라 후한 상금도 주겠다고 하였다 한다. 특무는 고려끝에 동의하고 군인들의 공제하에서 무전을 쳤다. 전사들은 이곳 상공을 공격점으로 하고 비행기를 기다렸다. 2,3시간 지나니 련계한 비행기가 도착하여 상공을 회전하였다. 포로한 무전사 특무를 시켜 구호선을 내려보내 달라 하라고 하였다. 비행기는 무전사의 지시대로 상공을 회전하다가 비행고도를 낮추고 구호선을 내려보내려 하였다. 순간 지휘부의 총소리와 함께 주위에서도 비행기를 묘준하여 사격하였다. 총에 명중된 비행기는 당장에서 추락되고 여러가지 통조림통들이 떨어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서쪽의 용암동굴에 특무지휘소가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이곳에서 잠간 휴식하고 길잡이를 따라 석하(돌로 된 경사지)를 따라 보천석에 도착하고 통전하를 건너 응회암대지에 오르니 절이 보였다. 절에 도착하니 사람은 없고 천정널 2,3장이 떨어졌을뿐 건물은 완벽하였다. 이 사당은 바로 종덕사이다. 팔각으로 되였다 하여 팔괘묘라고도 한다. 사당안에 쓴 글들도 깨끗하게 보존되여있었다.(후에 관광 갔던 사람들이 추워서 절당을 뜯어 불을 지펴 지금은 초석만 남았다.)사당앞과 옆에 있는 응회암대지에는 전날에 등산한 길일성종합대학학생들이 답사기면으로 사당주변의 응회암에 자기이름을 조각한것들이 보였다. 우리학생들도 사당기둥에 자기이름을 써서 기념으로 남겼다. 사당은 목조건물이지만 세공들이 건조하였고 질 좋은 홍송을 썼기에 정부에서 적당한 보호조치만 취했다면 지금도 있어 백두산의 관광경물은 더 한층 풍부하게 되였을것이다.
우리는 종덕사를 떠나 천지호반에 도착하였다. 천지는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높고 큰 화구호이고 물의 래원은 대부분이 지하수이다. 천지물은 남색인데 수시로 밀려오는 구름으로 하여 색갈의 변화가 많았다. 천지물에는 물고기도 없고 부유동물도 없었다. 천지주변은 깨끗한 모래로 둘러쌓여있고 지표표면에는 하나의 찌꺼기도 없었다. 일부 학생들은 천지물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들을 불러세워놓고 천지는 함락호이기 때문에 갑자기 깊어질수 있으니 천지안쪽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다. 잠시후 실습강의를 시작하였다. 북쪽에 있는 산은 룡문봉이고 서쪽에 있는 봉은 백운봉, 동쪽의 높은 산은 백두봉, 북쪽에 있는 산은 천문봉이다. 화산분출은 중심석이요, 천지는 함락으로 된 칼테라호이다. 화산은 여러 차례 폭발하고 용암이 분출하여 여러 가지 암석을 형성하였는데 이를 테면 현무암, 알카리성조면암, 흑요암, 응화암 등이다. 화산이 폭발될 때 때로는 용암이 나오고 때로는 화산회와 부석이 나오는데 그 수량이 대단히 많다.
그리고 화산폭발이 여러 차례이고 지금도 화산의 후기현상인 온천, 분출기공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귀로에 들어섰다. 길잡이의 인도에 따라 천문봉과 화개봉 사이에 들어섰는데 기본상 절벽에 가까웠다. 인신안전이 중요했다. 나는 학생들을 3명씩 한조로 10여개의 조로 편성하였다. 한번에 한조씩 올라가는데 앞에 선 사람이 낙석을 떨구면 뒤에 사람이 상할수 있으니 특히 주의하라 당부하고 등산을 시작하였다. 1조가 산무루에 올라서면 2조가 등산하고 2조가 산마루에 올라서면 3조가 등산하는 방식으로 등산이 계속되였다. 드디여 안전하게 마지막조까지 산등성이에 올라가자 전체 대원들은 너무도 기뻐서 한결같이 일어나서 만세를 웨쳤다.
한참을 걸어 내려가는데 갑자기 안개가 끼더니 앞에 있는 사람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잘못하면 대원을 잃을수 있어 매개 학생들에게 주의를 주면서 앞사람이 뒤사람을 책임지도록 하면서 어두운 밤을 한발두발 걸어 내려오는데 사방에 불빛이 나타났다. 모두가 당황해 하는데 길잡이가 산림속에 들어가 불빛이 나는 것을 손에 들고나와 이것은 나무가 썩은 것이니 안심하라고 하였다. 또 한참 걸어 가다가 밤길에 배가 고프겠으니 준비한 사탕과 과자를 먹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녀학생들은 준비한 과자와 사탕을 먹는데 대부분 남학생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여 왜 먹지 않는가고 물었더니 오는 길에서 다 먹고 없다고 하였다. 나는 선생님들이 준비한 과자와 사탕 그리고 녀학생들에게서 지원받은 사탕과자를 남학생들에게 조금씩 나눠주었다.
저녁 늦게야 숙소에 돌아온 우리는 부랴부랴 저녁밥과 반찬준비를 하려고 서둘렀다. 그런데 포수가 나오더니 곰고기를 이미 삶아놓았으니 반찬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나는 처음으로 곰고기를 먹었는데 소고기와 비슷하였다.
1954년 8월 10일(개였다가 흐림)
우리는 온천을 지나 폭포를 보러갔다.폭포근처는 폭포물이 튕기면서 물보라를 이루어 멀찌감치에서 보았다. 폭포는 크고 물량도 만으며 아주 웅장하였다. 폭포는 천지물이 통천하를 따라 냐려오다가 동서주항의 단층에 의하여 형성되였는데 낙차를 모두 합하면 86메터나 된다. 장백폭포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춘하추동 쉬임없이 쏟아지는 세상에 둘도없는 폭포라고 한다. 그리고 폭포의 상류는 통천하이고 하류는 이도백하임을 알려주었다. 도중에 온천에 들려 수온을 측정하니 최고 82도C였고 분소공을 찾아보니 열곳도 넘었다.
류황온천이기에 피부병치료에 매우 좋다고 이야기하고 온천욕을 하면 며칠간의 피로도 풀리니 온천욕을 하라고 권고하였다.숙사에 돌아온후 간단하게 실습총화를 하였다. 백두산은 화산활동에 의하여 형성된 화산주체이고 천지는 화산이 분출되고 함락된 칼테라호이며 수원은 지하수가 위주이고 물에는 유생물이 없어 물고기가 없고 기후수직대는 태원대로서 동북에서는 가장 추운곳이라고 총화였다.
1954년 8월 11일~12일(구름이 많음)
아침식사를 끝마치고 귀로에 올랐다. 도보로 원시림과 이도백하를 지나 송강에 도착하였다.
1954년 8월 13일
송강을 떠나 저녁에 학교에 도착하였다.
1954년 8월 14일
아침에 학교에 나와 림교장에게 실습회보하러 갔더니 교장선생님께서 모두를 수고했다면서 실습정황을 잘 알고있다고 하셨다. 어떻게 알았을까고 궁금했는데 우리와 같이 다닌 포수분이 어제 학교에 오셔셔 실습정황을 다 이야기하셨다는것이다. 그분이 바로 변방부대의 책임자라고 하셨다.
이번 실습은 아주 간고하였다. 실습준비도 힘겨웠지만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송강에서 실습지도를 책임진 송선생님이 “나는 실습지도를 할수 없으니 류선생님이 하오.”라고 한 마디 말이였다. 나는 학교를 졸업한지 1년이 채 안되고 실습지도경험도 전혀 없었다. 더구나 백두산은 처음이고 자료도 많이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못하겠다고 했지만 명령이라고 하시면서 재삼 부탁하여 할수 없이 실습지도를 하였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부족한 점들이 많았다. 실습생들이 많이 량해하여 주기 바란다.
실습대오의 구성: 명예회장 송영환 강좌장
실습지도교원: 유충걸
실습참가교원: 홍춘식
보위위원3명(현역군인)
길안내 및 운반공 3명
변방부대 고급군관 1명
학교의 경제상황이 어려운 형편에서 거액의 경비를 마련해주신 고 림민호교장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 유충걸, 유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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