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앓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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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6-03-11 12:34 조회4회 댓글0건본문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엄마의 생신날, 해마다 로인절이거나 엄마의 생신날이면 하늘나라가신 엄마가 더 생각난다. 엄마는 51세라는 젊은나이에 장암으로 돌아가셨다.엄마가 살아생전이라면 얼마나 좋을가... 나는 항상 엄마의 생전인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다.
나의 엄마는 3살에 외할머니를 여의고 계모손에서 자랐다. 달라재라는 촌에서 태여나서 어려운 동년을 보냈던 엄마는 째지게 가난했던 생활에서 탈출하겠다는 일념으로 15살 어린 나이에 벌목공모집 응시에 나섰다. 그러면 최소한 밥은 배불리 먹을수 있었으니깐. 그때는 호적관리가 허술할때라 키가 큰 엄마는 무사히 통과되였다. 산에서의 생활은 어렵기가 상상이상이였다.
아침에 잠에서 깨여나면 이불발치에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추운 고생 또한 많이 하셨다.엄마랑 같이 같던 친구들 대부분이 도로 집에 돌아왔지만 엄마는 이를 악물고 시련을 이겨냈다. 그렇게 그런 환경속에서도 공작을 잘했기에 엄마는 장춘에서 전차운전수를 모집하러 왔을때 연변의 제1대전차운전수로 뽑혀서 장춘에서 영광스러운 여자전철운전수로 되였다. 그뒤 엄마는 당시 연길시 공안국에서 경찰로 근무하던 아빠랑 결혼하게 되였고 사랑따라 연길시에 정착하면서 우리 삼남매를 낳으셨다.
”문화대혁명”이 금방 끝난때여서 그때는 기술인재가 많이 필요한 시기라 숙련된 전철기사를 배양하는것도 쉬운일은 아니였다. 장춘에서도 공작을 잘하신덕에 녀동생이 태여났던 해인 1968년에 장춘전철회사에서 엄마에게 가족까지안배할수 있다는 전제조건으로 데려갈려고 했지만 할머니께서 기어이 조선족이 사는 연길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셔서 그냥 연길에 살게 되였단다.
엄마는 위로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아래로는 우리 삼남매를 키우느라 항상 손이 마를새가 없었다.계다가 우리아버지가 박씨가문의 장손인지라 명절때면 더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돌아쳣다. 엄마가 처사를 잘하기에 박씨가문에서 엄마는 엄청 위신이 있었다…
여느 엄마들처럼 나의 엄마도 근검절약하였다. 엄마아빠의 월급으로 우리 형제 셋과 할머니까지 6명이 살려면 항상 돈이 빠듯하였다.
엄마는 자기에겐 "깍쟁이"였지만 시골사는 친척들에게는 진짜 잘해주셨다. 그때 우리집은 20평방메터 밖에 안되였다. 아빠가 병원에 출근하셨기에 모든 친척들은 아프면 자연히 우리집을 믿고 연길에 왔다.엄마는 그 누구에게도 똑같이 친절하게 대해주시고 평시보다 맛있는 음식을 해드릴려고 노력했다.철없는 우리는 친척들이 오면 맛있는 음식을 먹을수 있어서 좋아만했던 기억이 난다...엄마는 어려운 살림에도 친척들이 곤난하다면 항상 도와줬다.그래서 그런지 우리집은 항상 손님이 끊기질 않았다.엄마가 마음이 너그럽고 친절하니 아침에 "잘가세요"인사했는데 저녘에 또 다른 친척들이 방문오기 일쑤였다.지금와서 돌이켜 보면 진짜 엄마에게 머리숙여진다.
엄마의 손재간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엄마는 재봉기를 사서 신문으로 도본을 만들어서는 우리에게 손수 옷을 지어 입혔다.재봉일을 배운적도 없는 엄마가 옷을 척척 해내는걸 보고 아빠도 신기해하셨다...그렇게 엄마는 우리집의 사계절 옷들을 직접 만드시였다.동생은 맨날 내가 입던 옷을 받아입었지만 ,그때는 다 그렇게 사는법이여서 그런지 투정한번 부린적이 없었다.오히려 나의 옷을 받아입는 날이면 새옷이 차려졌다고 좋아서 싱글벙글하였다.
나는 어릴때에 외할머니가 엄마의 계모인줄을 몰랐다.엄마는 외할아버지집에 갈때면 꼭 외할머니 선물을 특별히 챙겨서 가져가곤했는데 나는 엄마가 외가집에 참 좋은딸이구나로만 생각했다.퍽 뒤늦게야 사실을 알게 되였지만.그뒤 외할아버지가 세상 뜨고난 뒤에도 엄마는 시종일관하게 외할머니에게 효도하셨다.엄마는 진짜 효녀였다.
우리가 어릴때에는 집집마다 겨울김치를 장만했었다.기나긴 겨울동안 반찬으로 먹을것이라고는 김치였다.우리집도 해마다 배추김치를 200포기 정도는 담궜던거 같다.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김치를 김치움에 보관했다가 겨울내내 먹는것이다. 엄마는 살림을 알뜰하게 하셨다.지금말로 알뜰주부였다.그시절에는 배추김치뿐만이 아니게 김치찌개,김치전,김치볶음,김치밴새,김치볶음밥......여하튼 이듬해 봄에 햇나물이 날때까지 엄마는 그렇게 우리들에게 여러가지로 맛있게 해서 먹였다.그래서 우리집은 김치 한포기도 버린적이 없었다.이런 엄마덕에 우리는 어릴때 음식의 여러가지 맛을 보았고 친구들도 우리집을 부러워했다.
엄마는 사람이 춥지 않으려면 발바닥이 따뜻해야 된다고 하셨다. 그때는 지금처럼 현대적인 난방설비가 되지 못해서 학교마다 난로를 피웠다.난로옆에 앉은 애들은 뜨겁다고 난리하고 좀 떨어져 있는 애들은 춥다고 난리들이였다.우리 3형제는 그때도 키가 커서 항상 교실 뒤켠에 앉았다.엄마는 저녘마다 우리들의 신깔창을 꺼내서 가마목에 말려서 이튿날 학교갈때면 신바닥에 깔아주었다.날마다 뽀송뽀송한 신바닥을 깔고 걸어가느라면 기분이 참 좋았다. 그리고 그 기분이 날마다 축복이 되였다.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출근하게 되였을때다.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데리고 백화상점 화장품가계에 가서 화장품을 사주었다.지금도 그때 엄마따라 처음으로 화장품가계 앞에서 설레이던 마음을 잊을수 없다.
엄마는 나에게 "여자는 자기에게 투자할줄도 알아야 된다"면서 돈을 어떻게 쓰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그때 내가 엄마에게서 전수받은것이 있는데 “아낄것은 아끼더라도 쓸때는 써야된다.”는 것이였다. 출근하게 되니 일단 핸드백을 사야겠는데 다른애들은 5원~8원사이를 샀지만 엄마는 나에게 14.40원되는 그때로서는 거금을 팔고 핸드백을 사줬다. 그덕에 다른 애들은 가방을 얼마 쓰지도 못하고 고장나서 버리고 또 새것으로 사야됐지만 나는 3년을 새 것처럼 썻다. 후에 작은 고모가 방문단으로 출국할때도 나의 핸드백을 빌려갔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출근하실때 해마다 단위의 선진공작자로 당선되였다. 그런데 병때문에 부득불 앞당겨서 퇴직하게 되였다. 단위의 령도들이 우리집에 찾아와서 퇴직증서를 엄마에게 넘겨줄때 나는 엄마의 눈가에 맺힌 이슬을 보았다. 자기가 그토록 아끼는 사업터와 동료들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했으리라…
엄마는 아프면서도 항상 우리 가족을 가슴에서 잊은적이 없으셨다. 퇴근해서 집에 돌아가면 항상 따끈따끈한 밥과 김이 몰몰나는 맛있는 반찬들이 밥상에 차려져 있었다. 날마다 자식들이 맛있게 먹는걸 보는것이 엄마의 락이엿다. 엄마는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나서 정확하게 5년뒤에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동안 엄마는 병때문에 비관한적이 한번도 없었다.항상 락관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세상을 사랑하며 살으셨다.5년동안 아빠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저녘마다 엄마를 리야커에다 앉히고 주사맞히러 다녔다.
그 사이 엄마에게 자식은 자기 목숨을 유지할수 있는 제일 든든한 한줄기의 끈이였다.엄마가 돌아가기 1년전에 남동생이 싸이판에 가게 되였다. 엄마는 살아야겠다는 의욕으로 아들이 돌아오면 볼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고 동통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우리가 남동생의 이름을 부르면 미음을 받아 넘기시였다. 하루라도 더 살아서 아들이 돌아오는걸 보시겠다는 일념으로 눈에는 눈물을 흘리시면서… 엄마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그렇게 우리의 엄마로만 살다가 51세라는 젊은 나이에 우리곁을 영영 떠나셨다.
아, 오늘도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의 일생은 짧았지만 생전에 우리에게 재산아닌 자산을 남겨줬고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도리와 마음씨를 가르쳐주셨다.나는 지금도 많은 일은 엄마에게서 배운대로 한다.나에게 나의 엄마는 그시대의 조선족엄마들의 형상을 대표할만큼 평범하지만 위대한 삶을 살다가신 분이다.
하늘나라가신 엄마, 부디 천당에서는 앓지 마세요…
어머님, 또 찾아뵐게요
박은화
우리 시어머님은 금년에 88세 고령이시다.내가 돌이켜 보니 고운정 미운정 쌓으며 시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산지도 어언 26년이 되였다.
시어머님을 말하자니 내가 금방 시집왔을때의 일이 생각난다. 그 시절에는 다들 단층집에서 살았다.시어머니는 아침잠이 많은 나를 깨울세라 새벽이면 조용히 아침밥을 지어놓으셨다. 내가 미안해하는 눈치를 보이면 "친정엄마도 이렇게 하잖소, 괜찮소."하며 웃어주셨다. 그때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쇠가마에 밥을 해먹던 시절이라 밥을 퍼낸후 밥가마에 붙어있는 누룽지가 아까워서 물을 부어서 누룽지까지 먹을 때였다. 시어머님은 나에게 출근하는 사람이 누룽지를 먹으면 배고파서 어쩌냐며 기어이 쌀밥을 "든든히" 먹고 출근하게 하셨다. 그리고 내가 출근한 뒤면 내가 입었던 옷들을 깨끗히 씻어서는 옷장안에 차곡차곡 개여놓으셨다.
시집와서 이듬해에 나는 엄마를 하늘나라에 보내게 되였다.내 마음은 홀로 사시는 아버지때문에 항상 걱정되였다. 특히 명절때면 더 하였다. 결혼전 아버지로 부터 "여자는 시집을 가면 시집법을 따라야 된다"는 교육을 받아왔던 나인지라 말은 못하고 속만 바질바질 태웠다. 매양 명절때면 시집형제들은 모여서 부모님과 명절을 쇠느라 즐거운 표정들이였지만 나는 속으로 한숨만 태웠다. 시어머님은 그러는 나에게 "어서 아버지 보러 가오, 명절때라 더 쓸쓸해 하겠는데... "하면서 과일꾸레미랑 음식이랑 장만해서 우리 부부에게 보내주셨다. 그때마다 얼마나 고맙던지...
시어머니께서는 어린나이에 일찌기 친정엄마를 잃은 내가 측은하다며 항상 신경써 주셨다. 마당에 터밭을 일구어 풋배추김치로 부터 여러가지 김치를 손수 만들어 주셨고 가지,고추...등 록색채소도 철따라 장만해 주셨다.
세월앞에 장사없다고 시어머님도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되셨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시어머님께서 자원하여 양로원에 가신지도 수년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다 그렇게 사는법이지만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젊었을때 시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아온 나는 언제나 송구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현재 옷가게를 하고있는 나에게 아직은 애들 둘을 공부시켜야 되니 가게를 그만둘수도 없는 상황이다.그래서 양로원에 계시는 시어머님에게 죄송한 마음뿐이다.옛날에 20평방도 안되는 집에서 시부모님들을 모시고 대여섯명 자식들까지 키우며 사셨던 조선족엄마들을 생각하면 경의로움이 앞선다.
젊었을때 가도에서 공작하셨던 시어머님은 나이 드신 지금 양로원에 가서도 남을 잘 도와주신다. 시어머님은 방송을 통하여 웬간한 젊은이들보다 국가대사에 더 관심이 많다보니 지금도 박식하다는 말을 듣는다.어머님은 드믄드믄 전화로 자식들에게 안부도 전하신다.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쁜사람"으로 되지말라는 부탁이다.
매양 우리가 찾아갈때면 시어머님께서는 "바쁜데 찾아오느라고 나야 잘먹고 잘자는데..."하며 당신께서 되려 미안해 하신다. 아픈데는 없는가고 물어보면 "나는 괜찮소. 걱정마오.부모들의 도움도 없이 몸이 약한 자네가 애들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얼마나 힘들겠소?"하며 오히려 나를 근심해주신다. 사실 시누이들에게는 이것저것 시키면서도 나에게 부담한번 안긴적이 없다.나는 항상 내가해야할 일을 도맡아 도와주는 시누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치매"는 방지하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시어머니에게 치매방지약을 사다 드렸더니 그렇게 반가워 하실줄이야. 시어머님이 기뻐하는 모습에서 효도하였다고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기실 별로 비싼약도 아닌데 말이다.
명절때면 시어머님은 방문간 우리들을 옆에분들에게 소개하며 그토록 즐거워 하신다. 그때마다 자주 와서 뵈야지를 생각하는 나지만 어쩐지 그렇게 되지 못하는것 또한 현실이여서 미안한 마음이다.
"내가 이렇게 오래살아서 너희들에게 부담을 주는구나..."시어머님이 늘쌍 하시는 말씀이다.
"어머님, 젊어서 자식들을 잘 키우신 보상이니 이제는 향수하는것이 응당한겁니다."
사람이 “늙으면 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다. 양로원에서 로인들은 서로 자기 자식을 자랑하며 누구의 자식이 부모뵈러 더 많이 오는가를 비교하신단다. 그래서 큰 시누이는 우리 형제들에게 한꺼번에 가지말고 날자를 나누어 가라고 알려준다. 양로원에 가면 첫눈에 복도쏘파에 일자로 앉아 계시는 로인들이 보인다.저마다 이번엔 누구네 자식이 부모보러 왔을가고 기대에 찬 눈길들이다. 가슴을 허비는 눈길 하나하나가 자식으로의 도리와 부모님들에 대한 효도를 가르쳐 주는듯하다.
시어머님은 지금도 우리 어른들보다 소학교 5학년에 다니는 막내손자가 더 보고싶다고 말씀하신다. 사실 시어머님이 바라시는건 우월한 환경의 양로원보다 김치쪼각을 드시더라도 금쪽같은 자식들과 함께 있는것이고 손주들의 응석을 받아주시고 싶을텐데...
올해도 다가오는 로인절을 맞으며 시어머님이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이다.나는 속으로 시어머님께 축복드린다.
"어머님, 자식들 걱정은 마시고 오래오래 앉으세요. 어머님 귀여워하시는 막내 손자 장가가는것까진 보셔야지요."
/박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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