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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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6-03-19 14:51 조회2회 댓글0건본문
녀자들의 수다란 아마도 스트레스를 푸는 하나의 방식인 것 같다. 여가에 한담을 하던중 누군가 집안의 골치거리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의 재봉침을 녀동생이 쓸모가 없는 거치장거리라고 고물장수에게 팔아버려 어머니의 노여움을 크게 산 나머지 집안분위기가 긴장해졌다고 하는 것이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저도 모르게 우리 어머니의 재봉침이 생각나며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에 떠올랐다.
어머니에게는 소중한 보물이 있다. 그렇다고 값진 골동품 같은 것이 아니고 어머니가 여태껏 아끼고 간수하는 재봉침인데 우리가 어릴때 어머니가 아글타글 모아서 장만했던 기물이다. 지금은 집구석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아무 쓸모도 없는 고물이지만 우리가 버리자고 하면 성을 내신다. 어머니의 동의가 없이는 누구도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물건인줄로 알고 있다.
그것도 그럴법하였다. 그 재봉침에는 어머니의 피땀과 희망, 즐거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살림살이를 하면서 가정기물들을 뜨르르하게 갖추어놓고 사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모든 녀자들의 로망이 아니겠는가. 그때 그 당시 재봉침을 비롯하여 집안기물들을 장만하는것 역시 어머니의 젊었을때의 락이였고 사는멋의 일부였으리라. 어머니는 어릴때 부모님을 여의고 고아원에서 불쌍하게 자랐다.
부모형제도 없이 외홀로 그 어두운 터미널을 지나 결혼해서 자식을 본후 잘 살아보자는것이 어머니의 꿈이였다. 내가 어릴때 어머니는 도문고무공장 정식로동자로서 재봉일을 하였다. 그 시절에 녀성들에게 정식직업이 있다는 것은 여간만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였다. 그러던 와중에 어머니의 인생에 또 하나의 전환점이 생겼다. 바늘 가는데 실 따라간다고 내가 여섯살 나던해 우리 온 집 식구는 아버지가 5.7간부로 농촌으로 하향하는 바람에 두메산골로 이사가게 되였다. 갓 태여난 녀동생까지 네식구가 짐을 푼 곳은 전기도 없는 두메산골이였다. 집이 없어 남의 집 창고에 들었는데 엄동설한에 겉바람이 새들어오니 소똥을 발라 바람을 막았다. 어머니는 불평없이 모든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묵묵히 참고견디였다.
일년 지나서 어느날 어머니를 따라 어쩌다 도문으로 가게 되었다. 겨울인지라 빙탕후루를 파는 것이 눈에 띄여 먹고 싶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빙탕후루를 사달라고 졸랐지만 어머니는 한족사람들이 코물을 묻혀 파는것이기에 먹을수 없다고 하면서 끝내 사주지 않으셨다. 그게 여섯살때의 일인데 지금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그 당시 어머니의 손에는 자식에게 빙탕후루 하나 사줄돈마저 없었던 것이다. 지금 세월에 자식이 먹겠다고 하면 무엇이나 다 사주는것이 부모인데 그때 어머니의 심정이 오죽했으랴.
내가 일곱살 나던해 우리는 또 아버지를 따라 공사마을소재지인 하북촌으로 이사하였다. 아버지는 공사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고 어머니는 역시 직업이 없어 가정주부로 되였다. 어머니는 학교 뒤산자락에 조그마한 땅뙈기를 일구고 채소를 심었다. 우리집은 도시호구여서 다달이 배급이 있었기에 쌀고생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남은 쌀을 보리고개를 넘기기 어려워하는 마을사람들에게 꾸어주고 가을에 웃돈을 주고 입쌀을 받았다. 그 덕에 우리는 입쌀이 귀한 그 시절에 이밥을 드문드문 먹을수 있었다. 그때 어머니의 바람은 그저 자식들을 굶기지 않고 배불리 먹일수 있는것이였다. 어느해인가 어머니는 옥수수쌀로 엿을 한가마 달여 우리는 하학후면 집에 도착하자마자 엿을 먹었다. 아 엿을 먹던 그때의 그 즐거움이란.
내가 소학교를 졸업하던 그해 아버지는 석현4중으로 전근령이 떨어져 우리는 석현으로 이사갔다. 그때 우리가 살던 집은 500원을 주고 산 20평방도 되나마나한 초가집이였다. 집안에 기물이라고는 찬장 하나에 책상 하나, 궤짝우에 얹어놓은 이불 몇채 고작 그것뿐이였다. 어머니는 석현종이공장에 림시공으로 들어갔다. 20세기 70년대 중반인 그 시기 석현은 자그마한 진이였지만 종이공장이 있었기에 로동자들의 생활수준은 괜찮은편이였다. 그 당시 재봉침이며 라지오, 자전거 등 가정기물을 구전히 갖추어놓고 사는것이 모든 가정주부들의 로망이였다.
잘 사는 집들에서는 집안에 이불장을 갖추어놓고 찬장에 꽃소래를 짝을 맞추어 몇개씩 올려놓는것이 류행이였다. 하지만 우리 집은 농촌에서 갓 올라오다보니 이불장도 없어 궤짝위에 이불을 올려놓고 홰대보를 덮는것이 고작이였다. 그 당시 재봉침, 손목시계, 자전거 등은 귀한 사치품이였다. 그런것을 갖추려는 것은 살림을 하는 모든 녀자들의 분투목표였다. 어머니에게도 아마 그런 것을 갖추어놓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꿈이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종이공장에서 나무껍질 벗기는 작업을 하였는데 3교대로 일하러 다니셨다.
어머니가 저녁작업을 하러 갈때면 아버지가 바래다주었다. 신체가 약한 어머니는 곱대거리를 하는것이 무척 힘들어 밤중에 앓음음소리를 내다가도 아침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아침밥을 짓고 우리들을 학교에 보내고 출근하였다. 그때가 바로 개혁개방을 금방 시작한때였다. 어머니가 일하는 나무껍질 벗기는 일터에서 일한 량에 따라 보수를 주었는데 계건제(计件制)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일전이라도 더 수입을 늘이려고 아픈 몸으로 열심히 일하였다.
나무껍질 벗기는 일은 로천에서 하는 일이여서 여름에는 더위고생을 하고 겨울에는 추운 고생을 하는 힘들고 고된 일이였다. 녀성의 몸으로 낫과 도끼를 들고 온종일 나무껍질을 벗기고나면 사지가 녹초가 되군 하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를 악물고 견지하였다. 2년후 어느 여름날 내가 하학하여 집에 들어서니 난데없는 재봉침이 떡 놓여있었다. 그때 재봉침을 마련하려면 여간 힘든것이 아니였다.
재봉침 값이 여간 비싼것이 아니였고 사려고 해도 면목이 없으면 살수 없는 귀한 물건이였던것이다. 어머니는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한푼두푼 돈을 모아 적금을 하고 마침내 재봉침을 마련하였던것이다. 어머니는 고된 로동으로, 자신의 피땀으로 그 재봉침을 마련한것이였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여있었고 나도 덩달아 기뻤다. 재봉침이 있으니 참 편리하였다. 어머니는 손수 재단을 하여 우리들의 바지를 지어주고 옷들을 수선하였다. 어머니는 재봉침을 보물처럼 아끼면서 우리들이 다치게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재봉침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막을수 없었다.
나는 하학후면 어머니가 출근한 틈을 타 몰래 재봉침을 돌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재봉침을 돌린다는것이 그만 실이 엉키여 재봉침이 돌아가지 않았다. 더럭 겁이 난 나는 가위로 엉킨 실을 베여버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날 어머니는 여느때처럼 재봉침을 쓰다가 잘 돌아가지 않아 무척 애를 먹었다. 나는 아닌보살을 하고 시치미를 뚝 떼였다. 어머니는 왕청에 있는 사돈을 청해 재봉침을 수리하였다. 그런데 얼마후 또 사달이 생겼다. 왕청에 있는 어머니의 5촌조카가 우리집에 놀러왔다가 우리집에 놀러왔다가 재봉침을 다쳐놓아 재봉침이 또 고장났다. 어머니는 또 사돈을 불러 재봉침을 수리하였다.
그때 재봉참은 우리 집에서 가장 값진 물건이였다. 우리 세 자식을 공부시키느라 힘들었지만 어머니는 살림살이를 물나게 하여 우리 집에서는 얼마후 라지오를 갖추어놓고 아버지의 손목시계도 샀다. 라지오를 산데는 또 에피소드가 있었다. 우리 옆집에 사는 이웃은 채농이였는데 수입이 괜찮아 그 집에는 라지오가 있었다. 라지오 듣기를 무척 좋아하는 나는 늘 옆집에 가서 라지오를 들었다. 나는 라지오가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다. 철이 없는 나는 어머니에게 우리도 라지오를 사자고 졸랐다.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돈을 모아 사준다고 약속하였다. 아버지의 47원 되는 로임에 어머니의 림시공 로임으로 수입이 많지도 않았는데 어머니는 어떻게 돈을 모았는지 얼마후 우리집에서는 라지오를 샀다.
그때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라지오가 가정기물중의 사치품이였지만 나에게는 세상을 접촉할수 있는 또 하나의 창구였다. 얼마후 옆집에서는 그 당시 가장 값진 사치품인 흑백텔레비죤을 샀다. 당시 텔레비죤은 사람들에게 대인기였다. 저녁이면 우리 삼형제는 옆집에 가서 텔레비죤을 보았다. 온 동네가 그집에 모여 텔레비죤을 보았는데 그 집은 우리 동네의 일등부자였다. 텔레비죤은 그 당시 모든 집들에서 가장 욕심내는 가정기물이였다. 내가 대학에 붙은후 우리 집은 아버지가 근무하는 학교의 사택에 이사갔다.
얼마후 아버지는 편지에서 우리집에서도 텔레비죤을 샀다고 알려주었다. 방학에 집에 돌아와보니 빨간색 텔레비죤이 나를 맞아주었는데 우리 집에도 텔레비죤이 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옆집에 사는 조선생님도 나를 보고 쌍직공인 자기네도 아직 텔레비죤을 사놓지 못했는데 자네 어머니는 참 대단하네 라고 하시면서 우리 어머니를 칭찬하는것이였다.
고정직업이 없는 어머니는 림시공으로 이리 저일 찾아하였다. 승벽심이 강하고 일욕심이 많은 어머니는 돈을 벌어 잘 살아보려고 역한 냄새가 나고 일이 고된 점착제 달이는 공장에 림시공으로 들어가 2년동안 이를 악물고 일하여 돈을 모았던것이다. 남부럽지 않게 갖추어놓고 잘 살아보고싶은것이 어머니의 꿈이였으리라. 물론 자식농사를 잘 짓는것이 어머니의 가장 큰 념원이였기에 어머니는 우리 삼형제에게 늘 부모님이 계셨더라면 자기도 공부를 할수 있었겠는데 하시면서 우리들에게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였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우리 삼형제는 모두 공부를 열심히 하여 대학에 갔다. 그후로부터 몇년이 지나 우리 자식들이 성가하고 아버지도 퇴직하고 부모님은 자식들을 따라 연길로 이사왔다. 생활수준의 제고로 새로운 가전기물들이 나오고 어머니가 젊은 시절 아글타글 모아서 사놓으셨던 흑백텔레비며 라지오같은 가정기물들은 도태되여 모두 버려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재봉침만은 버리지 않으셨다. 단층집에서 살다가 아빠트에 이사갈때 녀동생은 어머니에게 재봉침을 버리자고 건의하였지만 어머니는 동의하지 않으셨다. 할수 없이 가지고 갔지만 제 자리를 차지 못하고 구석에 놓여 애물단지로 전락되였다. 쓰지도 못하고 자리만 차지하는 재봉침을 두고 어머니와 녀동생은 늘 갈등이 생겼다.
북경에서 사업하는 남동생이 부모님을 북경에 모셔가려 하였지만 부모님은 고향에서 사는것이 좋다면서 녀동생과 함께 사신다. 녀동생이 더 널직한 집에 이사가면서 또 재봉침을 버리자고 제안하니 어머니는 “내 물건에 손대지 말아라. 내가 죽은 다음에 버리던지 해도 지금은 안된다” 라고 하시면서 여간 노여워하지 않으신다. 어머니는 재봉침을 자신의 침실에 고이 모시고 보배단지마냥 여기시며 틈만 나면 닦고 또 닦으신다.
한평생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살아오신 어머니는 한푼의 돈도 허투루 쓰지 않고 자식을 위해 가정을 위해 알뜰히 살림하면서 열심히 살아오셨다. 오늘도 어머니는 재봉침을 정성들여 닦고계신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 꿈과 청춘, 삶을 열심히 살아오셨던 그 시절의 값진 추억이 고스란히 깃들어있는 재봉침! 이 귀중한 재봉침은 우리 집의 제1호 보물로 지금껏 고이 모셔져있다.
/리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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