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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엄마는 엄마로서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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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6-03-19 14:54 조회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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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강하다. 엄마는 이제껏 혼자 있기를 고집하다가 얼마 전에야 우리 집으로 왔다. 아흔 고개를 바라보는 엄마는 지금 고혈압, 당뇨, 심근증… 여러 질환에 부대끼고 있다. 그렇게 강하던 엄마건만 인간의 숙명인 생로병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세월을 이기는 사람이 없다더니 그토록 건강하던 엄마도 결국 이제는 백기를 들고 여러번 입원하였다. 이젠 병원도 동네 마실 가듯이 한다. 엄마는 입원실에서 며칠째 의식이 없다가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한다. 그때마다 우리는 엄마의 손을 꼭 쥐며 내심으로부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엄마는 곧바로 집으로 가자고 우겼다. 사실 엄마는 한평생 병원을 멀리하고 살았다. 웬간한 병은 자기 나름 대로의 ‘토방법’으로 떼고 만다.


엄마는 일찍 19살에 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고 37살 젊은 나이에 대동란의 피해로 남편을 잃었다. 그러나 엄마는 무너지지 않고 이를 악물고 우리 다섯 남매를 훌륭하게 키워냈다. 특히 엄마는 사업에서 성과를 내여 이름을 날렸다.


연길시어린이옷공장 창시자인 엄마는 8급재단사로서 동북3성 어린이양복 전시회에 참가하여 2등의 영예를 따냈고 엄마의 사적도 사진과 함께 신문에 번듯하게 실렸었다. 엄마에겐 시대를 읽을 줄 아는 눈이 있었다. 당의 11기 3차 전원회의가 열려 개인 공상업을 허용하니 첫 사람으로 영업허가증을 내고 20명의 일군을 둔 복장공장을 꾸렸다. 엄마는 원래 옷을 만드는 데 재간이 있었다.


우리 5남매의 옷은 모두 우리 엄마가 직접 만들어 입혔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래로 기성복을 사는 법이 없었다. 엄마는 자기가 만드는 옷이 시내에서 파는 기성복보다 더 보기 좋다고 항상 자부했다. 확실히 엄마가 해준 옷은 그럴듯했다.


내가 어릴 때 동네나 학교에서는 모두 이 옷 어디서 산 거야, 수놓이도 예쁘다면서 부러워하는 눈길을 보내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우리 엄마가 해준 거지 뭐 "하고 즐거운 웃음을 날렸다. 엄마의 옷가게는 동북3성 시장을 주름잡았다. 옷들이 만들어지기 바쁘게 팔려나갔다. 당시 서시장에 석재단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도매군들이 줄쳐 들어오고 미처 옷 만들기 바쁘게 다투어 가져갔다.


얼마간 돈을 모으게 되자 엄마는 려관도 꾸렸다. 그때 엄마는 “지금의 려관들은 너무 더럽고 봉사태도가 안 좋으니 그저 깨끗하고 손님에게 싹싹하게만 대하면 꼭 성공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엄마의 말이 적중했다. 그 깨끗함과 싹싹함이 먹혀들어가 우리 집 려관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엄마는 그때 류행하기 시작한 개인창업에서 마음껏 솜씨를 피웠다. 엄마는 그때 돈으로 국가에 세금 30여만원을 납부하였다.


녀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단 말은 바로 우리 엄마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엄마는 우리 앞에서도 웃음보다는 항상 아버지 같은 엄한 모습을 많이 나타냈다. 그래서 우리 자식들은 엄마를 많이 무서워하는 눈치들이다. 그래 우리는 엄마 하고 부르기도 조심스러워했고 어리광도 그리 부려보지 못했다.


사실 나는 강한 엄마보다 현재의 약한 엄마가 좋다. 육체가 망가짐에 따라 엄마는 마음도 많이 약해져갔다. 엄마는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을 때면 엎치락뒤치락하다가도 쩍하면 옆에서 자는 나의 팔을 만져보았다. 그리고는 “살이 많이 빠졌구나…” 하시며 내 이불을 꼭 여며주군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는 척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뜨거워나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밥을 먹을 때도 그랬다. 고기붙이라도 있으면 자꾸 내 밥그릇으로 집어놓는다. 그러면 나는 부담스러운 즐거움에 잠기군 한다.


엄마는 나이가 드실 만큼 들어 이제는 정신이 흐리마리하지만 사리는 누구보다도 밝다. 한번은 시장에서 소고기를 사왔다. 그런데 집에 와 보니 휴대폰으로 치른 값 36원이 건너가지 않았다. 나는 “오늘 엄마 공짜 소고기 잡숴요.”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데 엄마는 그게 아니였다. 노발대발하면서 당장 그 돈을 갔다주라고 호령하여 나는 신도 벗을 사이 없이 돈을 도로 갔다주고 왔다. 나는 그 장사군의 웃음에서 엄마의 웃음을 보았다.


또 한번 나의 아들 결혼식날 한집에서 부조봉투가 두개가 들어왔다. 아마 시간이 바빠 내외간이 서로 호상 못 왔거니 하면서 두분 다 보낸 모양이였다. 엄마는 한집에서 봉투 두개가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바삐 사는데 당장 하나는 갔다 드리라는 것이다. 사람은 바르게 살아야지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였다.


어느 한번 야밤중에 바스락바스락하는 소리가 나기에 깨여났더니 까다닥까다닥하며 분명 쏘파 밑에서 쥐새끼가 무엇을 까먹는 소리가 났다. 우리 집은 1층이여서 밤에 창문을 열고 자면 어쩌다가 쥐가 들어오기도 했다. 잠에서 깬 나는 열에 받쳐 고놈의 쥐를 때려잡겠다고 몽둥이를 찾으며 씩씩거리는데 엄마는 “얘야, 그만하거라. 걔도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이 한밤중까지 자지 않고 먹거리를 찾아 헤매겠느냐? 배가 부르면 나가겠지.”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에 나는 그만 몽둥이를 찾던 손이 움츠러들고 말았다.


그랬다. 엄마는 모든 생명을 존중했다. 엄마는 전에 농촌에서 쥐를 잡고 참새를 잡을 때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려 항상 남들 뒤에 처졌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비판을 받았건만 지금까지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고 한다. 엄마는 그 어떤 생명을 죽이는 것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위대한 모성이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리라.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된 엄마는 언젠가 나에게 말했다. “얘야, 글은 일단 중점이 있어야 한다. 너처럼 집안일을 하듯이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늘어놓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사람이 착하고 바르게 사는 도리를 풀이해야 된단다.” 엄마는 내가 쓴 글을 다 보고 하는 얘기임에 틀림없다. 나는 정말 이 말을 명기하고 글을 썼다. 그랬더니 정말 발표되기도 했다. 나는 그 발표된 글을 자랑하며 나의 첫 독자인 엄마에게 “엄마, 모두 엄마 덕이요.” 하자 엄마는 빙그레 웃는 것이였다.


90세인 엄마는 지금 많이 늙어있고 몸도 편치 않으시다. 어떤 때는 아이와 같이 굴 때도 있다. 그러다 보니 이 딸이 엄마의 엄마로 되여가고 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어떻게 이 엄마 노릇을 할지 잘 모르겠다. 하여 나는 많은 고민을 해왔다. 전통적인 효만을 알아왔으니 그것을 실천에 옮기자니 여간 만만치가 않았다. 나는 엄마를 잘 모시기 위해 엄마를 떠올려보았다. 순간 나는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엄마의 마음처럼 엄마를 모시는 것이야말로 정답인 것 같았다.

/전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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