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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잃은 설움, 잊어선 안 된다 (후속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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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6-03-21 17:39 조회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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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6월에 발생한 일이다.


강원도 양양에 살던 홍길상은 일본놈의 강제징병을 피해 한밤중에 마을 뒷산으로 피신했다. 일주일 후 마을이 잠잠해지자 집으로 왔다가 눈앞이 캄캄해지는 소식을 들었다.


둘째 형님이 끝내 일본놈의 수사대에 잡혀 끌려간 것이다. 지금까지도 종무소식이다.


이곳에서 더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부인과 딸, 맏형네와 넷째 동생과 함께 가정 식솔을 이끌고 정든 고향을 떠나 만주 피신길에 올랐다.


그래도 1941년 고향을 떠나오던 날 밤, 어두운 골목길에서 “만주 땅에 갔다가 시국이 편해지면 꼭 돌아오너라.” 하며 손을 흔들던 연로하신 시할아버지의 모습이 평생 눈앞에 선하다고 하셨다.


갖은 고생을 무릅쓰고 도착한 곳이 만주 길림성 조양천이었다.


빈주먹밖에 없어 그들은 촌장네 머슴살이를 했다. 새벽에 일하러 나가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머슴살이도 얼마 하지 못하고, 일본놈의 벼농사 개척민으로 송강성 계동으로 끌려갔다.


큰 강 한 개 외에는 허허벌판만 보이는 고장이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그때 일본놈 개척회사에서는 선심을 쓰는 듯했다.


논을 일구는 데 필요한 쟁기와 종자벼, 생활용품, 냄새나는 옥수수 가루를 먼저 제공하고 가을에 벼로 갚게 했다.


삽, 도끼 등 쟁기가 있자 끌려온 조선인 40여 호는 굵은 버드나무와 풀을 베어 초막을 지었다.


살 곳이 마련되자 장정들은 삽으로 벌판을 한 삽 한 삽씩 파 논을 일구고, 강물을 끌어올리는 물도랑을 팠다.


집집의 부인과 큰 자녀들은 벌판과 강변에서 나물을 캐고 물고기를 잡았다.


그럭저럭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왔다.


누렇게 여문 벼를 베어 타작하자 일본놈 개척회사에서는 트럭을 몰고 와 타작한 벼를 몽땅 실어갔다.


식량은 여전히 냄새나는 옥수수 가루였다.


1944년 봄은 계동 개척민들이 두 번째로 맞는 봄이다.


남정들은 일본 개척회사의 강요로 땅이 녹자 삽으로 벌판을 파 번졌다. 개척민 여성들은 조를 나누어 계동에 있는 일본 개척회사에 가 벼 종자를 가져와야 했다.


첫번에 홍길상의 부인 등 6명이 벼 종자를 가지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조양천에서 태어나 자란 아들 홍용협이 갑자기 열이 심하게 나 홍길상의 부인은 가지 못하고, 넷째 제수 등 5명이 계동으로 떠났다.


그들이 계동으로 가려면 줄배를 타고 목릉하를 건너야 한다. 강가에 이르니 봄장마로 목릉하는 몹시 불어 있었다.


그래도 제때에 파종하려면 지체할 수 없다.


그들이 배를 몰고 강심에 이르렀을 때 급물살로 배가 몇 번 기우뚱거리더니 뒤집혔다.


배를 탄 5명의 부인들은 강물에 떠내려가 사라졌다.


개척민 남정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찾았으나, 3일 만에 버드나무에 걸린 홍길상의 넷째 제수를 구조했고 4명의 시체는 찾지 못했다. 그래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였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개척회사에서는 트럭으로 벼 종자를 실어왔다.


이렇게 지은 벼농사는 여전히 일본놈들의 좋은 일이었다.


1945년 봄에도 냄새나는 옥수수 가루로 연명하기 위해 개척민들은 논을 더 일구며 벼농사를 지었다.


그해따라 벼가 더 잘 자랐다. 일본 개척회사의 일본놈들은 더없이 좋아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했다.


일본 개척회사도 계동에서 사라졌다.


그해 가을에 개척민들은 이곳으로 끌려온 후 처음으로 흰밥을 배불리 먹어보았다.


1946년 봄, 토지개혁으로 개척민들은 자기들이 일군 논을 반 헥타르씩 분배받았다. 그리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 40여 호 개척민들은 초가 3간 집을 짓고 살았으며, 마을 이름을 신명촌이라고 지었다.


1992년 8월 24일, 중국과 한국이 수교하자 조선족들의 한국으로 나가는 길이 넓어졌다.


나도 한국에 나와 15년 있다가 지금은 중국 광주시 아들 집에서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있다.


가슴 아픈 일은 고향을 떠난 선배들이 고향 땅을 밟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할수록 나라 잃은 설움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글을 쓴다.

/조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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