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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아버지의 울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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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6-05-27 22:08 조회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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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하늘나라에 보낸후 나와 동생들은 주말마다 아버지집에 가서 청소를 하고 맛 좋은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기를 벌써 5년째다.


“딩동-딩동-”


초인종을 누르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듯 문을 열고 반긴다. “왔니”하고. “왔니”, 주말마다 듣는 소리지만 낮고도 부드러운 아버지의 이 한마디가 가슴을 따뜻하게 했다. 문을 떼고 들어서니 동생들이 이미 와있었다. 녀동생은 늘 나보다 먼저 오군 한다. 녀동생은 공무원인데 한 주일에 이틀 휴식에 매주 토요일마다 빠짐없이 아버지의 집으로 온다. 녀동생은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주려고 집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냉장고에 아버지가 즐겨드시는 과일이랑 가득 채워넣는다. 


올해 춘추가 여든여섯인 아버지는 습관처럼 소파에 앉아 텔레비를 본다. 그러면서 “무슨 음식을 그리 많이 하느냐”고 가끔식 부엌을 향해 한마디씩 던진다. 남동생은 삼형제중 막내이지만 부모에 대한 효성이 남달랐다. 남동생은 일찍부터 자기가 살고있는 아빠트단지에 집을 사놓고 부모를 모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자 남동생은 아버지가 고독해할세라 끼니를 늘 아버지와 함께 하군 한다.  아버지의 얼굴에 홍조가 일렁이면 나와 동생들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 어리광을 부리기도 한다. 사실 우리 삼형제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부럼없이 자랐고 아버지의 그늘에서 남들보다 날개를 더욱 크게 키웠던것이다.


아버지는 평생 군인으로 계셨는데 어머니를 만나 슬하에 딸 둘, 아들 하나를 두었다. 삼형제중 내가 맏이다. 어릴적 우리 삼형제는 군인인 아버지를 둔 긍지를 안고 참으로 부럼없이 자랐다. 지난세기 60년대와 70년대는 나라가 가난하여 집집마다 거개가 입에 풀칠하며 살아갔다. 


우리는 한 지붕아래 여러 세대가 즐느런히 들어앉은 단층주택에서 살았다. 그래서 이웃을 1호집, 2호집하고 불렀는데 모두 친척처럼 가깝게 보냈다. 그때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옆집에 돌리며 인사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누가 우리집에 음식을 보내오면 꼭 그 그릇에 더욱 많은 음식을 담고서 나 혹은 동생에게 지워 들고가게 했다. 그러면서 가서 여차여차하게 인사를 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때는 집집마다 여유가 없다보니 항상 먹거리가 모자랬다. 그래서 엄마는 배급권을 동네 잔밥들이 많은 집에 주군 했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네에서 “급시우”로 받들렸다. 왜내하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늘 이웃에 베풀었기 때문이다. 


어릴적 일이다. 해마다 음력설이면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꽁무니를 따라 시골 큰집에 갔다. 시골에 있는 큰집은 한 울타리에 삼대가 모여사는 집이다. 그때는 렬사가족과 군인가족이 우대를 받는 세월이였다. 그래서 군인 아들을 둔 할아버지네 시골집처마밑에는 일년사철 해바라기만큼 큰 붉은꽃이 달려있었다. 해마다 음력 초하루가 되면 생산대 대장은 꼭 할아버지를 방문하고 손수 술한잔 올리고나서 마당을 쓸었다. 그리고는 처마밑에 색 바래진 붉은꽃을 새것으로 바꾸어달아주었다. 큰집은 고풍스러운 팔간집을 쓰고사는데 할아버지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늘 깨끗한 강목한복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어 남다른 풍격을 갖췄다. 


아버지는 우리가 시골에갈적마다 우리한테 큰집에 도착하면 할아버지한테 어떻게 인사해야 하고 행동거지는 어떻게 해야 하며 많은 친척들 앞에서는 어떻게 공손해야한다는 여러 가지 주의사항들을 일러주어 우리들은 시골집에 가는 길에 가슴은 항상 부풀어 있었고 도착하면 우리형제는 대복에 붉은 넥타이를 맨 예쁜 모습으로 할아버지한테 다소곳이 절을 하여 항상 할아버지와 여러 친척들의 칭찬을 받았다. 이렇게 아버지는 자식들의 인성교육에 남달랐고 시골에 있는 동안에도 할아버지를 즐겁게 하고 당신의 형님과 형수 조카들을 잘 챙겨 할아버지와 큰집식구들은 아버지에 대해 항상 감개무량해하였다.


아버지는 집에서도 한결같았다. 아버지는 군인이다보니 하향이 잦았다. 그리하여 엄마가 우리 삼형제와 함께 있는 시간이 퍽 많았다. 자녀들에 대한 교양에서 아버지는 대체적으로 보듬는 편이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와 달리 엄했다. 생각해보면 우리 삼형제가 아버지한테 어리광을 부렸어도 엄마한테 어리광을 부린 기억은 별로 없다. 룡정고중을 졸업한 어머니는 아버지와 달리 “잔소리”가 심했다. 우리 집안에서는 어머니가 “군인”이였고 아버지가 오히려 “서민”이였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늘 “손을 씻고 상에 마주 앉아라”, “옷의 단추가 제대로 잠궈졌는가 살펴라”고 맨날 들볶았다. 어머니는 우리가 감기에 걸려 신음할 때에도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애들의 병엔 어미가 의사다”하며 집안에서 조리했는데 이 때문에 아버지와 분기가 생기기도 했다. 생전에 엄마는 가족들에게 자연의 섭리를 많이 터득시켜주었다.  


물론 어머니가 몸이 허약하여 자식들의 어리광을 모두 받아주기에는 무리였다. 그러다보니 아버지가 그 자리를 메워주었다. 아버지는 하향하고 돌아오면 집안에 밀렸던 일들을 하나하나 해나갔다. 그때는 거개가 단층집이였고 집앞에 창고가 있었다. 동네에서는 모두 문앞에서 빨래를 하고 문앞에서 화로불을 지펴 음식을 만들기도 했다. 아버지는 늘 빨래를 하는데 유별나게 창고에 들어가 했다. 아버지가 빨래를 하면 어머니가 밖에 내다 널었다. 아버지가 창고에 들어가 빨래를 한것은 동네아줌마들이 어른이 거북하게 아낙네들의 일을 한다고 흉을 볼가봐서였다.


아버지는 외출하고 돌아올 때면 꼭 나와 동생들의 학용품과 그림책을 사다주었는데 남동생에게는 반도체부품들을 더 사다주었다. 동생이 반도체조립에 흥취가 있었기때문이다. 이렇게 아버지는 가족을 소홀함이 없이 챙기였다. 저녁이면 아버지는 우리의 숙제를 검사하고 또 틀린 부분을 여차여차하게 고쳐주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놀음에 탐을 내도 종래로 꾸중하지 않았다. 우리가 혹 동네 아이들과 다투고 집으로 들어오면 우리를 혼낼 대신 내심하게 자초지종을 듣고나서 차근차근 시비를 가려주었다. 우리가 아버지의 말씀에 수긍하면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인차 “그럼 얼른 가서 사과해야 하지 않을가?”고 했다.


지금 아버지는 여든다섯의 고령이다. 아버지는 직업이 군인이여서인지 지금도 생활이 규칙적이고 무엇이든 정리를 하며 사신다. 그러나 필경은 로인이다. 아버지의 기력은 점점 떨어지고 기억력도 차하다.  몇년전인가 아버지는 우리 삼형제를 두고 “너희들이 장하다. 나는 이젠 시름이 놓이는구나”라고 칭찬을 했다. 그때 아버지는 분명 가슴이 뿌듯이 말했다. 우리 삼형제도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마음으로 가슴이 뿌듯해났다. 그런데 요즘들어 가슴 한구석이 몹시 시려난다. 아버지는 말수가 점차 적어진다. 그토록 넓고 그토록 풍성했던 울타리가 황페해지는것 같아 두려워난다. 얼마나 튼튼했던 울타리였고 얼마나 포근했던 울타리였던가! 그런데 지금 우리는 안타까움으로 잠 못 이룰 때가 많다. 그래서 그 “울타리”를 기억속에 영원지 지워지질 않을 “울타리”로 장식하고자 나와 동생들은 다투어 아버지를 찾는다.

/허향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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